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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를 다시 가라면 가겠는데, 고등학교 시절로는 죽어도 안 돌아간다."

어느 날 '10대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어떨까'라는 이야기 중에, 오래 전 군생활을 마쳤던 친구가 한 말이다. 고교 시절 내내 짓누르던 대학입학 시험에 대한 공포가 상상을 초월했다는 것인데, 시험이 뭐길래 오죽했으면 학교 대신 군대를 다시 가겠다고 그랬을까.

하기야 중고등학교 시절에 수없이 치렀던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등은 물론이고, 대학입학시험을 위해 힘겹게 공부했던 기억은 누구에게나 있었을 터.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를 주문처럼 입에 달고 살았던 10대 시절, 숱한 불면의 밤을 지새우게 만든 건 불행히도, 첫사랑의 연인이 아니라 지긋지긋한 시험이었다.

조선왕조 아동교육, 역사 정체성과 자부심 확립

▲ 왕 앞에서 시험을 보는 왕세자와, ‘서양인이 본 조선-서당(The School-Old Style)’영월 책박물관 소장.
ⓒ 세종대
그렇다면 우리 조상들의 교육은 어떠했을까? 그들도 시험을 보기는 했을까? 조선시대 왕위를 물려받으려던 왕세자들과, 입신양명을 꿈꾸던 아동들의 교육은 어떠했는지 따라가 보자.

<격몽요결>과 <동몽선습>

조선시대 유교사회에서는 유아를 '동몽(童蒙)'이라 표현했는데, 주역에서는 "'몽'은 산기슭을 흐르는 물의 형태를 비유한 것으로서 유아가 무한히 발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격몽요결(擊蒙要訣)> 1577년(선조10)에 율곡 이이가 편찬, 간행했다. 조선중기 이후 아동 교육의 교과서로 널리 쓰여졌기 때문에, 활자를 비롯해서 목판본이 여러 차례에 걸쳐 출판되었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동몽선습(童蒙先習)> 조선 중종 때 박세무가 저술하여 1670년(현종11)에 간행했다. <천자문>을 익히고 난 후 아동들이 배우는 초급교재 역할을 담당했다. 부자유친(父子有親)·군신유의(君臣有義)·부부유별(夫婦有別)·장유유서(長幼有序)·붕우유신(朋友有信)의 오륜(五倫)을 설명했다.

이어 중국의 삼황오제에서 명나라까지의 역대사실과 한국의 단군에서부터 조선시대까지 역사를 요약했다. / 최육상
세종대 만화애니메이션 산업연구소는 조선시대 왕세자들과 아동들의 교육 내용을 '조선왕조 아동교육'이라는 디지털콘텐츠로 한데 모았다.

콘텐츠는 <격몽요결> <동몽선습> <소학> <명심보감> 등 문헌 자료를 바탕으로 세종대 역사학과 오성 교수, 이장우 박사 등의 고증을 거쳐 신뢰도를 높였다.

콘텐츠 구성은 왕세자교육, 아동교육, 시각자료, 교육학적 해석, 원천자료 해석 등 5가지로 나뉜다. '왕세자교육'과 '아동교육'을 분리해 이들의 교육내용과 방법이 어떻게 다른지 설명하고, 역시 왕세자들이 교육받았던 '자선당·비현각'과 아동들이 교육받았던 '서당'을 구분해 보여주고, 당시 교육이 교육학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는 지와 <격몽요결> 등 원천자료에 대한 해석도 함께 제공한다.

대부분 15세 이하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서당 공부와 8세 전후에 책봉된 왕세자들의 공부를 살펴보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콘텐츠 개발을 책임진 세종대 만화애니메이션학과 최은경 교수는 조선의 아동교육을 개발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요즘 아동교육 관련 책들을 보면 대개가 서양의 교육이론을 짜깁기한 것들이에요. 하지만 조선시대 아동들의 교육 내용에는 지금의 교육문제를 보완할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있어요. 특히 지덕체를 고루 발달시키는 교육체계나 최고의 엘리트인 왕세자교육에는, 서구의 교육이론에 밀려 뿌리를 잃고 사상적으로 방향을 잡지 못한 아동교육의 역사 정체성과 자부심을 확립할 수 있는 내용이 담겨 있어요."

최 교수는 이어 "공교육의 붕괴와 사교육의 팽배로 인한 영재교육의 어려움은 청소년 문제로 확대되고 있다"고 현 교육체계의 문제점을 지적한 후, "아동영재교육과 인성교육을 바탕으로 한 전통교육내용의 우수성은 신토불이 교육전략으로써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시험 때문에 불면증과 불안감에 시달린 왕세자들

▲ 장유(長幼)와 붕우(朋友)의 이륜을 지키도록 모범이 되는 사람을 뽑아 그 행실을 엮은 <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 삼척 박물관 소장본.
왕세자들은 신분사회에서 선택받은 자들로서 엘리트 교육을 받은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들도 시험을 피할 수는 없었다.

왕세자가 제대로 공부를 하고 있는지 점검하는 것은 '법강(法講)'이나 '회강(會講)'을 하는 과정에서 매일 이루어졌다. 수업을 시작할 때마다 이전에 배운 것을 확인했으며 또한 수시로 책을 덮고 전날 배운 것을 외우게 했다.

공식적인 시험은 '고강(考講)'이었다. 고강은 과거 응시자들이 보는 구술시험과 성균관에서 실시하는 정기시험을 가리키는데, 왕세자도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에서 치렀다.

5일에 한 번씩 실시한 시험성적은 왕에게 보고되었고 성적이 좋지 않으면 왕세자는 호되게 꾸중을 들었다. 그래서 왕세자들은 시험 날짜가 다가오면 심한 불면증과 두통, 불안감에 시달렸다. 오늘날 수험생과 마찬가지였던 셈.

이러한 문답형식의 교육방법은 논리적인 토의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왕자들의 두뇌 발달을 촉진시켰다. 이를 통해 논리적 사유체계를 확고히 하였으며, 한편으로는 훗날 왕이 되어 신하들과 정책결정 과정에서 논리적인 토론을 펼치게 하는 바탕이 되었다.

조선의 독자적 성격을 강조한 서당 교육

한편 일반 아동들이 교육을 받았던 '서당'은 소규모로 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고도 설립할 수 있어서 조선 후기에 널리 퍼져 있었다. 서당은 교육학적 측면에서 보면 초등교육기관이었고, 유학교육기관이자 사설교육기관이었다.

서당의 교육내용은 읽기, 문장, 글씨쓰기로 이루어졌다. 읽기는 <천자문> <유합(類合)>으로 시작해 <동몽선습> <소학>을 배웠고, 그 다음에 <통감(通鑑)> <사서삼경(四書三經)> 등을 익혔다.

서당에서 눈에 띄는 것은 우리 것에 대한 교육이었다. 조선초기 문신이었던 서거정(徐居正)이 편찬한 <유합>은 중국의 <천자문>에 비해, 일상생활과 밀접한 내용으로 아동의 이해와 사고에 부합했고 <동몽선습>은 매우 간략하면서도 조리 있게 우리나라의 역사를 정리했다. 이들을 아동 교재로 사용한 것을 보면 중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양반들도 조선의 독자적 성격을 강조했음을 알 수 있다.

▲ 안동향교(왼쪽)와 도산서원 복원이미지. 조선시대 교육은 유교사상에 따라 '인의예지' 등 인성교육 중심으로 이뤄졌다.
ⓒ 세종대
최 교수는 '조선왕조 아동교육' 콘텐츠에 담긴 여러 아동교육내용 중에서 특별히 유교의 유아교육 사상원리를 강조했다.

"지행일치(知行一致), 생활교육, 발달특성의 원리 등은 주목할 만해요. 지행일치는 지식으로써 실천을 이끌고 실천으로써 지식을 시험하며 인간성 실현을 강조해요. 생활교육은 부모형제나 스승의 말과 행동에 담긴 예(禮)를 중시했죠. 유아들의 발달 특성을 고려해 성숙도, 개성과 능력에 따른 개인차 인정, 발달순서, 자발성 등 교육원리 이외의 내용도 중요하게 다뤘죠."

최 교수는 이어 "시험으로 고통을 받기는 했지만 왕세자들의 교육 내용은 기본적으로 '인성' 강화 중심이었다"며 "유교적 가치관에 따라 군주의 기본적인 덕목으로 '인의예지(仁義禮智)'를 강조했는데, 이는 인간 상호간의 '관계'가 최우선이었음을 알게 해 준다"고 덧붙였다.

이는 입시공부 위주의 현재 교육 내용이 인성교육 중심으로 재검토되어야 한다는 설명으로, 콘텐츠를 개발한 궁극적인 목적이기도 하다.

아동교육은 인간 상호간의 '관계'가 최우선

▲ 왕세자들이 교육을 받았던 '비현각' 내부로, 스승 쪽에서 바라본 세자의 자리이다.
ⓒ 세종대
콘텐츠는 아동교육 관련 시나리오 소재 개발에 주력했다. 서양 교육이론이 판치는 출판물과 영상물 등의 교육자료를 우리 것으로 대체하기 위함이다. 최 교수는 인성교육에 초점을 맞춘 출판물을 펴낼 계획이라고 밝혔다.

"정부가 지원한 문화콘텐츠의 성격상 공공성이 우선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세종대가 개발한 '조선왕조 아동교육'은 요리할 수 있는 장을 본 것이지, 밥상을 차린 건 아니에요. 인성교육 교재를 만들기 위해 캐릭터 등을 마무리하기는 했지만, 교육기관과 언론사 등 관련 업계가 함께 맛있는 요리를 만들었으면 해요(웃음)."

조선왕조 아동교육은 경쟁력 있는 차세대 교육문화콘텐츠를 개발한다는 목적을 지녔다. 조기교육과 영재교육, 영어마을과 국제학교 등이 부각되는 요즘, 현대 교육학적 입장에서 전통교육에 담긴 전인교육체계를 재해석한 것은 분명 의미가 있어 보인다.

더욱이 오늘날 교과서와 지식 중심의 교육에 따른 아동의 문제점을 해결하자는 콘텐츠는 옛 것에서 새 것을 찾는다는 점에서 눈 여겨 볼 만하다.

조선 왕세자들의 교육환경은?

차기의 국왕을 교육시키는 스승인 '서연관(書筵官)'의 자격 조건은 엄격했다. <경국대전>의 서연관 선발 자격을 보면, 첫째 문신이고, 둘째 뇌물을 받거나 부정한 방법으로 재물을 취한 자의 자손은 제외시켰고, 셋째 적임자로 물망에 오른 관리는 다른 관직에서 임기가 만료되지 않았더라고 선발할 수 있었다.

원자시기의 교육은 '교육환경의 조성'에 중점을 뒀다. 원세자의 경우 조선사회에서 교육자원의 제한을 받지 않던 거의 유일한 존재였기 때문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접하는 모든 환경을 교육적으로 만드는 것이 가능했다. 이와 관련한 교육관을 보여주는 왕조실록의 대목을 살펴보자.

"일찍이 금중(禁中)에 들어와 강보에 있을 때부터 바탕이 있도록 교양하여, 두세 살 어린 나이의 희롱에 있어서도 절도 없는 데에 접하지 말고 좌우의 듣고 보는 것이 모두가 바른 법도에 맞도록 하면, 습관과 성질이 이룩되어 착하지 않으려 하더라도 그럴 수가 없을 것입니다."

성적과 행실 좋지 않아 왕위 계승 못한 숱한 왕세자들

이는 성리학의 성선설에 입각해 환경만 나쁘지 않다면 사람은 착한 본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믿음에 근거한 것이다. 물론 이런 일관된 환경 속에서도 조선 왕조 500년 동안 모두 27명의 왕이 즉위했지만 적장자(嫡長子)로서 보위를 이은 왕은 단 8명뿐이라는 사실은 교육심리적으로 그 의미하는 바가 크다.

특히 적장자이면서 왕위계승에서 탈락된 왕자는 시험 성적이나 행실이 좋지 않은 것이 이유였는데, 세종의 형인 양녕대군이 대표적이다.

세자는 8살을 전후해 책봉되며 곧바로 성균관에 입학하는 의식을 행했다. 입학 무렵 <천자문> <동몽선습> 등은 이미 학습하였으므로, 교육은 <소학>에 큰 비중을 두고 진행했다. 이후 소위 전문단계인 사서(四書)를 학습할 단계에서는 과거준비 위주의 교과배정보다는 군주에게 요구되는 인격수양이나 경륜을 쌓는 방향에서 교과를 선택했다.

한편, 서당에서는 정규과정 이외에 배우는 것이 있었는데, 육갑(六甲)·구구(九九, 산수)·고을모둠(지명놀이)·성모둠(성씨놀이)·관혼상제·세계(世系)·국호(國號) 등이 그것이다. 서당에서 이러한 일상적인 것들을 가르치는 것은 당시 봉건사회에서 국민적 자질을 높이고, 사회성원으로서 직분과 책임을 다하여 예절 바른 생활을 하도록 교육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세종대 만화애니메이션 산업연구소의 ‘조선왕조 아동교육’ 콘텐츠 자료 열람
http://edu.culturecontent.com ->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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