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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3년 1월 13일은 한국인이 미국 이주를 시작한지 꼭 10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1902년 12월 22일 한국인 102명을 태운 미 여객선 갤릭호가 제물포항을 떠나 일본을 거쳐 하와이 호놀룰루항에 기착한 때가 이듬해 1월 13일인 것.

▲ 제물포에서 초기 미주 한인 이민 102명을 태웠던 미국 상선 갤릭호.
ⓒ 이영일

1903년부터 본격적인 미국 이주를 시작한 동포들은 조국을 떠나 차별의 땅에서 숱한 역경과 고난을 겪으면서도 오로지 민족의 해방과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 조국으로 돌아갈 것만을 믿으며 그 기구한 생을 살아 왔다. 막노동과 날품팔이, 소작농 등의 힘겨운 생활 속에서도 동포들은 희망을 잃지 않았으나 그 생활은 가히 비참했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내무총장겸 국무총리로 활동할때의 도산 선생.
ⓒ 이영일
그러한 동포들이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가 옆을 중심으로 한국인들만의 거점을 형성하고 동포 사회의 단결을 추진해 나가기 시작했으니, 이러한 움직임에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 도산 안창호 선생이 있기에 가능하였음을 설명하지 않을 수 없겠다.

도산 선생은 1902년 25세 때 이미 교육학을 공부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으나 동포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보고 이들의 생활개선이 더 시급함을 느껴 공부를 포기하고 동포들의 권익보호와 화합, 생활개선에 앞장서기 시작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기도 했던 도산 선생은 1903년 9월 샌프란시스코 시내 유다스트리트에 한인 최초의 교회 '상항연합감리교회'를 세워 동포들의 지친 마음을 어루만졌고, 거리에서 한국의 인삼 장수들이 서로 머리를 잡고 싸우는 것을 보고 새생활 공동훈련을 위해 한인친목회와 공립협회를 설립, 공립신보(共立新報)를 창간하는 등 동포들의 상부상조에서부터 조국의 해방을 위한 단결 고취 등 한인 사회를 지도하였다.

▲ 공립협회는 도산 선생이 세운 미주 최초의 한인단체 한인친목회가 발전하여 설립되었다. 1열 왼쪽부터 송석준, 이강, 안창호 선생이다.
ⓒ 이영일
1907년 신민회 조직을 위해 귀국하였던 도산 선생은 평양과 대구에 자기회관을 설립하고 국외에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국내 진입을 위한 훈련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으나, 105인 사건과 안중근 의사의 이토오 히로부미 저격사건으로 일제의 탄압을 받게 되자 그 유명한 거국가를 남기고 다시 미국으로 망명한다.

마침 도산 선생이 직접 설립한 공립협회와 하와이의 한인합성협회(韓人合成協會)가 연합한 국민회(國民會), 다시 이 국민회와 1905년 캘리포니아 파사데나에서 설립된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가 연합하여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가 설립되자, 도산 선생은 1912년 11월 북미와 하와이의 대한인국민회 지방총회를 비롯, 만주와 시베리아에까지 설립된 4개의 지방총회를 모아 중앙총회를 결성하기에 이른다.

▲ 1915년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 경축 행사의 한 장면.
ⓒ 이영일

도산 선생은 이렇게 해외 동포들의 총단결이 이루어지자, 민족을 대표할 인재 양성을 구체적으로 실천할 조직 구상을 박차를 기하였다. 1912년, 리버사이드에서 로스엔젤레스로 온 도산 선생은 우강 송종익(宋鍾翊) 선생과 청년학우회의 이념을 계승할 단체를 구상하고 조직에 착수하여 1913년 5월 13일 흥사단을 창립하였다.

▲ 도산 안창호 선생이 작성한 독립운동 단계별 방략도 초안과 흥사단을 구상하면서 확립한 독립운동 방략도.
ⓒ 이영일

▲ 도산이 도안한 흥사단의 깃발. 원 안은 기러기로 단결을 상징하며 황색은 무실(務實), 홍색은 역행(力行), 백색은 충의(忠義), 청색은 용감(勇敢)으로 흥사단 4대 정신을 표현하고 있다.
ⓒ 이영일
흥사단(興士團·Young Korean Academy)은 미주 이민의 흐름이 꼭 10년 4개월이 지난 1913년 5월 13일, 한인 이민 사회의 중심지 샌프란시스코에서 도산 안창호 선생과 경기도 홍언(洪焉), 충청도 조병옥(趙炳玉), 경상도 송종익(宋鍾翊), 전라도 정원도(鄭源道), 평안도 강영소(姜永韶), 함경도 김종림(金宗林), 황해도 민찬호(閔燦浩), 강원도 염만석(廉萬石) 등 8도 대표들로 창립되었다. 흥사단은 순수 국내 한국인이 설립한 NGO의 효시였으며, 동포들의 발전은 물론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발전을 위한 교육·인재 양성의 원대한 시작이었다.

▲ 1916년 흥사단 제4차 연례대회의 모습. 1열 왼쪽 네번째가 안창호 선생이며, 사진 왼쪽 표식은 흥사단을 상징하는 기러기로 단결을 나타낸다.
ⓒ 이영일
흥사단은 당시 미주 사회의 주요 지도자였던 박용만, 이승만 등의 독립운동 전략과는 차별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무력운동과 외교운동 중심이 아닌 지식인·기독교 신자·유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인격수련 중심의 운동방식이었다.

동 년 12월에는 기독교 신자들이 많이 모여 살던 시카고에 흥사단 평안도 대표인 강영소의 역할로 흥사단 시카고 지부가 설립되었고 1922년도에는 뉴욕 매디슨 23가의 매디슨 애베뉴 감리교회를 중심으로 한 흥사단 활동을 주축으로 전 미주 지역으로 활발히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흥사단은 미국의 3권분립 정치체제를 도입, 입법부(공의회)·집행부(이사회)·그리고 사법부(심사회)와 같은 세 기능으로 조직을 구성하였다. 이는 이민 1세대들에게 미국 사회 속에서 민주주의의 원칙을 쉽게 습득하고 절차와 과정을 중시하는 미국인들의 사고를 공유하는 기능으로도 작용하였다.

▲ 대한인국민회 임원진의 모습.
ⓒ 이영일
흥사단 단우들 중에는 대한인국민회 소속인 사람들이 많았다. 그것은 미국으로 돌아온 도산 선생이 1912년 11월부터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총회장으로 활동하고 있었는데서 연유하기도 했지만, 대한인국민회가 을사조약 폐기운동·합병 반대운동 등 실천적인 독립운동을 추진하면서도 동포들의 친선과 권익 도모에 소홀히 하지 않고 미국인들과의 법적 투쟁이나 노무계약·한국에서 건너오는 유학생의 입국허가나 입학허가 등 구체적인 한인사회 대변 역할을 해 캘리포니아 주정부 등으로부터 공식 법인 설립을 받는 등, 동포 사회 발전을 위한 도산 선생의 노력에 적극적 지지와 믿음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는 당시 대한인국민회가 도산선생을 위시한 흥사단의 정책론을 그대로 따르고 있었음을 알려주게 하는 것이다. 지금으로 보자면 흥사단이 대한인국민회의 정책 브레인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고 할까..

흥사단은 단우(흥사단은 회원을 단우라 부른다)로 가입하는 절차에 있어서도 우선 단의 목적과 활동을 찬동하고 예비단우 문답위원들로부터 구두시험을 거쳐 도산 선생이 직접 주례를 하는 입단식에서 선서를 했는데,

입단식이 당시 기독교의 세례문답과 유사한 형태를 띔으로서 결과적으로 당시 교회를 중심으로 확장되었던 미주 이민사회 속에서 새로운 조직을 통한 조국 독립의 열망, 나라없는 설움에서 오는 소속감 결여를 해소하는 기능을 하며 거부감 없이 흥사단의 이념이 급속히 전파되고 그 세가 확산되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거꾸로 이러한 한인 교회가 독립운동과 건국을 대비한 인재 양성에 있어 흥사단 단우들의 훈련장소로 매우 큰 역할을 하였으며 이는 도산 선생의 흥사단 단우 교육방법이 기독교 신앙과 교회조직훈련방법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흥사단 함경도 대표 김종림이 설립하고 흥사단원 곽림무가 훈련을 맡아 재외 한인들을 국민군으로 편성하고자 한 한인비행학교 훈련생의 모습. 사진 좌측 네번째가 임시정부 노백린 군무총장.
ⓒ 이영일
흥사단은 독립운동의 지원과 물자보급 등의 운동을 추진하기 위해 1917년 샌프란시스코에 북미실업주식회사를 설립 캘리포니아 쌀 농사에 주력하기도 하였고, 1920년 캘리포니아주 윌로우스에 한인비행학교를 설립, 공군 조종사를 훈련시키기도 하였다.

또한 국내에는 수양동맹회·동우구락부·수양동우회등의 조직과 중국에 원동위원부 등의 흥사단 조직들을 건설하는 한편 해외 여러 군데로 나뉘어져 있던 독립운동가들의 역량을 하나로 모아 통일된 상해임시정부를 조직하고 이에 자금지원을 하는 등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흥사단은 1913년도부터 1917년도까지 집중적으로 하와이, 멕시코, 쿠바 등의 동포 등을 대상으로 흥사단 운동을 전파하여 나갔으며 1915년에는 안창호 선생이 직접 하와이 호놀룰루로 건너가 동포 노동자들을 위로하면서 조직강화를 꾀하였다.

흥사단은 1913년 3월 1일, 국내에서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미국내 중국인들의 협력을 통해 독립의연금 모금을 추진하였다. 흥사단 경기도 대표인 홍언 단우를 중심으로 캘리포니아·오레곤·워싱턴·유타·아이다호 등지에 산재해 있던 중국인 상인 교상(僑商)들로부터 기부받은 자금을 독립운동 기금으로 조성하는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였고, 도산 안창호 선생은 직접 "미국에게 보내는 한국인의 호소"라는 글을 써 시사주간지 네이션(The Nation)에 게재하여 약 12,600$를 거두는 대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또한 3.1운동 이후 미주 여러 지역의 여성단체들이 모여 결성된 대한여자애국단(大韓女子愛國團)을 뒤에서 후원하기도 하였다.

▲ 3.1운동 소식을 접한 흥사단원들과 미주 한인들은 1919년 4월, 필라델피아에서 자유한인대회를 열고 세계만방에 한국의 독립을 알리기 위해 한인독립연맹의 이름으로 태극기를 들고 시가 행진을 전개했다. 시위대 앞에는 미국인들의 군악대가 앞장을 서고 있다.
ⓒ 이영일
그러나 흥사단은 가장 궁극적 목적인 인물양성을 위한 교육 및 동포들과 한국인 유학생(新渡學生)을 대상으로 흥사단원으로 입단시켜 훈련을 시켜 나가는데에 소홀히 하지 않았다. 이 중에는 조병옥(趙炳玉), 장리욱(張利郁), 오천석(吳天錫), 이용설(李容卨), 최희송(崔熙松)등 쟁쟁한 인물들이 많은데, 장리욱 박사의 경우 1912년 미국 유학중에 일부러 로스엔젤레스에 거주하는 도산 선생을 찾았고 1917년에는 여름 중부 캘리포니아의 다뉴바(Dinuba)농장에서 학비를 벌기 위해 일하던 중 도산 선생과의 문답을 통해 흥사단에 입단하였다. 그 이후 장리욱 박사는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1925년 듀북대학 졸업생이 되었고 나중에 캘리포니아에서 흥사단 일을 맡아 하게 되었다.

흥사단은 1920년까지 미주에서 150여명의 단우를 확보하여 동맹독서·동맹운동·동맹 작업·동맹저축등을 통해 단우 각자의 수련과 동지적 결속에 힘썼다. 이렇듯 흥사단은 초기 미주 한인 사회속에서 한인 사회의 단결과 미국 사회 속에서 정착하는데 정신적인 지침과 방향을 제시하는데 크기 기여하였다. 그 이면에는 도산 안창호라는 위대한 지도자가 있었으나, 그 자신 스스로 자신의 정치적 사고가 총결집된 조직 "흥사단"의 주요 핵심 단우였기에 그의 모든 활동은 흥사단 정신에 입각하여 사고되고 계획된 흥사단 방략에 따라 진행되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겠다.

▲ 1916년 흥사단 연례대회 장면. 가운데 도산 안창호 선생이 보이며 사진 오른쪽이 도산의 부인 이혜련 여사이다. 건물 중앙에 흥사단의 영어 약자인 YKA (Young Korean Academy)와 건물 오른쪽 한문으로 興士團이 새겨져 있다.
ⓒ 이영일

"務實力行(무실력행)으로 생명을 삼는 忠義男女(충의남녀)를 단합하여 情誼(정의)를 敦修(교수)하며 德·體·智(덕·체·지) 삼육을 동맹수련하여 건전한 인격을 지으며 신성한 단체를 이루어 우리 민족 전도 번영의 기초를 수립"한다는 흥사단의 목적은, 당시 미국 사회의 한인들에게는 민족을 단체의 구심점으로 삼는 매력과 발전적 역사관을 갖는 민족 자존심, 미국 사회 속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우리의 능력을 신뢰한다는 점, 건전한 인물이 되어 민족의 부흥과 발전된 민주사회 건설을 위한다는 원대한 포부를 주기에 충분하였다.

흥사단은 이러한 목적을 위해 '건전 인격'과 '신성 단결'을 2대 강령으로, '인격 훈련'과 '단결 훈련', '공민 훈련'을 3대 수련으로, 務實·力行·忠義·勇敢(무실·역행·충의·용감)을 4대 정신으로 설정하여 동포들에게 강한 정신 무장과 인격 훈련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 성립 당시의 도산. 앞열 왼쪽에 신익희 선생이 보인다.
ⓒ 이영일
이러한 흥사단이 최근 한인 이주 100주년과 흥사단 창립 90주년을 맞아 국제 NGO로서의 미주 지역 조직 재건과 활성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관련기사 : 창립 90주년 맞은 흥사단, 국제NGO 전략 추진)

흥사단 본부가 흥사단 운동의 발원지인 미국 사회에 도산 안창호의 사상과 흥사단 정신을 현대에 맞게 새로 보급하고 침체기에 있던 미주위원부 조직을 강화, 한인 사회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미국 사회내의 흥사단의 움직임은 로스엔젤레스 제퍼슨가 1368번지에 위치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관 복원 운동 과정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대한인국민회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도산 선생이 추진한 미주 한인 최초의 통일기구인데, 이 복원사업을 한국의 도산 안창호 선생 기념사업회가 주도하여 추진하고 있고, 지난 2월 27일에는 대한인국민회 관련 미주 독립운동사 유물들이 1500여점이나 쏟아져 나와 그 발걸음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관은 애국관이라고도 불리웠다. 여기에서 신한민보를 발행하였고 2세들에게 한글,한국문화를 가르쳤다.
ⓒ 이영일
흥사단은 미주 이민 100주년과 흥사단 창립 90주년을 맞는 2003년도에 미주 6개 흥사단 조직 강화에 심여를 기울이고 있다.

조국의 독립과 미국 한인 동포들의 권익 보호,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노력해 온 흥사단! 2003년도에 미주 이민사에 있어 그동안 부각되지 않았던 숨은 역할이 빛을 봄으로서 한국 사회와 교포사회 발전을 위해 다시 새롭게 기여하게 되길 기대해 본다.

주인인가 나그네인가!

▲ 평생을 나라사랑과 조국 해방을 위해 헌신한 도산 안창호 선생.
<동아일보> 1925년 1월 25일자에 게재된 글로, 우리 민족사회에 대한 영원한 책임감을 갖는 진정한 주인이 되어 민족을 구원할 구체적 방법과 계획 아래 자기의 몸이 죽는 데까지 노력할 것을 당부한 글이다...<필자 주>

묻노니 여러분이시어, 오늘 대한사회에 주인되는 이가 얼마나 됩니까. 대한 사람은 물론 다 대한 사회의 주인인데 주인이 얼마나 되는가 하고 묻는 것이 한 이상스러운 말씀과 같습니다. 그러나 대한인이 된 자는 누구든지 명의상 주인은 다 될 것이되 실상 주인다운 주인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어느 집이든지 주인이 없으면 그 집이 무너지거나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그 집을 점령하고, 어느 민족 사회든지 그 사회에 주인이 없으면 그 사회는 망하고 그 민족이 누릴 권리를 딴 사람이 취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민족의 장래를 위하여 생각할 때에 먼저 우리 민족 사회에 주인이 있는가 없는가, 있다하면 얼마나 되는가 하는 것을 생각지 아니할 수 없고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로부터 여러분은 각각 우리의 목적이 이 민족 사회에 참주인인가 아닌가를 물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인이 아니면 여객(旅客)인데 주인과 여객을 무엇으로 구별할까. 그 민족 사회에 대하여 스스로 책임심이 있는 자는 주인이요 책임심이 없는 자는 여객입니다. 우리가 한 때에 우리 민족 사회를 위하여 뜨거운 눈물을 뿌리는 때도 있고 분한 말을 토하는 때도 있고 슬픈 눈물과 분한 말뿐 아니라 우리 민족을 위하여 몸을 위태한 곳에 던진 때도 있다 할지라도 이렇다고 주인인 줄로 자처하면 오해입니다.

지나가는 여객도 남의 집에 참변이 있는 것을 볼 때에 눈물을 흘리거나 분언을 토하거나 그 집의 위급한 것을 구제하기 위하여 투신하는 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인이 아니요 객인 때문에 한 때 그리고 말뿐 그 집에 대한 영원한 책임심은 없습니다. 내가 알고자 하고 또 요구하는 주인은 우리 민족사회에 대하여 영원한 책임심을 진정으로 가진 주인입니다.

.......(중략)....

그 집안 일이 잘되어 나가거나 못되어 나가거나 그 집의 일을 버리지 못하고 그 집 식구가 못났거나 잘났거나 그 식구를 버리지 못하고 자기 자신의 지시과 자본의 능력이 짧거나 길거나 자기의 있는 능력대로 그 집의 형편을 의지하여 그 집이 유지하고 발전할만한 계획과 방침을 세우고 자기 몸이 죽는 시각까지 그 집을 맡아가지고 노력하는 자가 참주인입니다. 주인된 자는 자기 집안 일이 어려울 경우에 빠질수록 그 집에 대한 염려가 더욱 깊어져서 그 어려운 경우에서 건져내 방침을 세우고야 맙니다.

이와 같이 자기 민족사회가 어떠한 위난과 비운에 처하였든지 자기의 동족이 어떻게 못나고 잘못하든지 자기 민족을 위하여 하던 일을 몇 번 실패하든지, 그 민족사회의 일을 분초에라도 버리지 아니하고, 또는 자기 자신의 능력이 족하든지 부족하든지 다만 자기의 지성으로 자기 민족사회의 처지와 경우를 의지하여 그 민족을 건지어 낼 구체적 방법과 계획을 세우고 그 방침과 계획대로 자기의 몸이 죽는 데까지 노력하는 자가 그 민족사회의 책임을 중히 알고 일하는 주인이외다.

내가 옛날 고국에 있을 때에 한 때 비분강개한 마음으로 사회를 위하여 일한다는 자선사업적 일꾼은 많이 보았으나, 영원한 책임을 지고 주인 노릇하는 일꾼은 드물게 보았으며 또 일종의 처세술로 체면을 차리는 행세거리 일꾼은 있었으나 자기의 민족사회의 일이 자기의 일인 줄 알고 실제로 일하는 일꾼은 귀하였습니다.

내가 생각하기는 지금와서는 그 때 보다 주인 노릇하는 일꾼이 생긴 줄 압니다. 그러나 아직도 그 수효가 많지 못한 듯 합니다. 한 집 일이나 한 사회 일의 성쇠흥망이 좋은 방침과 계획을 세우고 못세우는 데 있고 실제 사업을 잘 진행하고 못하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주인이 있는 뒤에야 문제지 만일 한 집이나 한 사회에 책임을 가진 주인이 없다고 하면 방침이나 사업이나 아무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 즉 어떤 민족사회의 근본 문제가 주인이 있고 없는 데 있습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살피어 내가 과연 주인이요 나밖에도 다른 주인이 또한 많다고 하면 다행이거니와 만일 주인이 없거나 있더라도 수효가 적을 줄로 보시면 다른 일을 하기 전에 내가 스스로 주인의 자격을 찾고 또한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주인의 자격을 갖게 하는 그 일부터 하여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과거에는 어찌하였든지 이 시간 이 경우에 임하여서는 주인 노릇할 정도 일어날 만하고 자각도 생길만 하다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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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와 대학원에서 모두 NGO정책을 전공했다. 문화일보 대학생 기자로 활동했고 시민의신문에서 기자 교육을 받았다. 이후 한겨레 전문필진과 보도통신사 뉴스와이어의 전문칼럼위원등으로 필력을 펼쳤다. 지금은 오마이뉴스와 시민사회신문, 인터넷저널을 비롯, 각종 온오프라인 언론매체에서 NGO와 청소년분야 기사 및 칼럼을 주로 써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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