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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 군사반란은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이 계엄사령관을 체포한 하극상'이었습니다.

당시 계엄법에 따르면 비상계엄의 선포와 동시에 계엄사령관은 계엄지역 내의 모든 사법사무를 관장했습니다(계엄법 제11조). 따라서 합동수사본부장이 계엄사령관에 사법권을 행사하려면 계엄사령관 보다 상부의 재가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렇기에 합동수사본부장이었던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 일당들은 계엄사령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납치와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를 받으려는 작전을 동시에 진행했습니다.

하지만 계엄사령관은 전국을 계엄지역으로 하는 경우에만 대통령의 지휘감독을 받고, 부분 계엄 시에는 국방부장관의 지휘감독을 받아야 했습니다(계엄법 제9조). 이를 이유로 최규하 대통령은 합동수사본부에 국방부 장관의 승인을 먼저 받으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렇게 반란군들은 정승화 총장 납치뿐만 아니라 최규하 대통령과 신현확 국무총리에게 위력을 행사하고, 노재현 국방부 장관을 찾아내려 하였으며, 이들은 반란군에게 무기력하게 당했습니다. 육군본부 2인자인 육군참모차장 윤성민은 납치된 정 총장을 대신해 반란을 진압해야 했지만, 그조차 무력하게 반란군에게 백기를 들었습니다. 1979년 그날 신군부의 반란에 무기력했던 최규하(대통령 묘역), 신현확(사회공헌자묘역 17호), 정승화(장군1묘역 13호), 노재현(장군2묘역 523호), 윤성민(장군2묘역 443호) 모두 국립대전현충원에 잠들어 있습니다.

최규하 대통령 "국방부장관 동의를 받아 오세요"
 
국립대전현충원 대통령묘역에 안장된 최규하 제10대 대한민국 대통령
 국립대전현충원 대통령묘역에 안장된 최규하 제10대 대한민국 대통령
ⓒ 정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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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서울의 봄>에서 최한규(배우 정동환) 대통령역의 모티브가 된 최규하 제10대 대한민국 대통령은 국립대전현충원 대통령묘역(국가원수묘역에서 2022년 국립묘지법 개정으로 대통령묘역으로 명칭 변경)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2004년 9월, 대전현충원에 8기 규모의 대통령묘역을 조성했지만, 이승만, 박정희, 김대중, 김영삼 대통령은 서울현충원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최 대통령만 유일하게 대전현충원에 안장된 전직 대통령입니다.

최규하 대통령은 일제강점기였던 1919년 7월 원주에서 출생해 경성제일고, 동경고등사범학교를 졸업, 만주국 길림성에서 행정과장을 하던 중 해방을 맞이했습니다. 이승만 정부 시절부터 농림부·외무부 등에서 일했으며 박정희 정부 시절 외무부장관을 거쳐 국무총리가 됐습니다. 1979년 10.26사건 당시 국무총리였기에 대통령 권한대행이 됐고, 1979년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해 제10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취임했습니다. 최 대통령이 취임 6일 만에 전두환 신군부는 군사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해 결국 1980년 8월 16일 대통령직을 사임했습니다.

12.12 반란군이 끝내 노재현 국방부 장관을 데려오자 최 대통령은 13일 오전 5시 10분경 정승화 총장 연행보고문에 재가 서명했습니다. 당시 자리에 함께한 신현확 국무총리의 증언에 따르면, 최 대통령은 서명과 함께 일시를 기재했습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 증거가 남아 있지 않습니다. 보안사령부가 작성한 <제5공화국 전사> 부록의 '수사착수건의' 공문에는 최 대통령의 서명과 '79. 12. 12.'라는 날짜가 기재되어 있습니다.

최 대통령이 12.12 재판에서 증언했다면 12.12 군사반란과 5.18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많은 의문이 풀렸을 겁니다. 하지만 그는 많은 의문을 남긴 채 2006년 10월 22일 서거했습니다.

이등병으로 강등된 육군참모총장 정승화 대장
  
국립대전현충원 장군1묘역 13호에 안장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국립대전현충원 장군1묘역 13호에 안장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 정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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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이성민이 연기한 정상호 역은 1979년 당시 계엄사령관이자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정승화 대장을 모티브로 했습니다. 정승화 총장은 육군사관학교 5기 출신으로 당시 대한민국 육군의 최고 선배이자 책임자였습니다. 그는 군의 정치 참여에 부정적이었고, 하나회를 견제하기 위해 장태완 장군을 수도경비사령관으로 임명했습니다. 이에 위기를 느낀 전두환과 신군부 하나회 세력은 정 총장을 납치하는 것으로 12.12 군사반란이 시작됐습니다.

보안사령부 인사처장 허삼수에게 납치되어 서빙고 분실로 끌려간 정승화 총장은 수모의 시간을 겪었습니다. 내란방조죄로 10년 형을 선고받은 그는 이등병 불명예 전역되었습니다. 무려 17계급을 강등당하는 굴욕스러운 처분이었습니다. 1988년 제5공화국 청문회, 1995년 전두환·노태우 구속 재판 등에 증언에 나서 전두환을 비롯한 하나회 처단에 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

2002년 6월 16일에 사망한 정승화 총장은 어쩌면 이등병 전역이었기에 현충원 안장 자격이 없을 뻔했습니다. 내란방조죄 재심을 청구했던 정 총장은 사건이 있고 18년이 지난 1997년 7월 3일 무죄를 선고받고, 육군 대장 자격을 회복했습니다. 결국 국립 대전현충원 장군1묘역 13호에 안장됐습니다. 정 총장 묘지 근처에 반란군 최고 선배였던 유학성(장군1묘역 2호)의 묘가 있어, 씁쓸함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사라진 지휘권자 노재현 국방부장관
  
국립대전현충원 장군2묘역 523호에 안장된 노재현 국방부장관
 국립대전현충원 장군2묘역 523호에 안장된 노재현 국방부장관
ⓒ 정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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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오국상(배우 김의성) 국방부장관은 사건과 동시에 사라져 반란군도 진압군도 심지어 관객들도 애타게 찾던 인물이었습니다. 모티브가 된 실제 인물인 당시 노재현 국방부 장관의 행적을 보면 이는 사실이었습니다. 육군참모총장 공관(지금은 대통령경호처로 사용)과 국방부장관 공관은 한남동 공관촌에 이웃하고 있었습니다. 정승화 총장 납치 당시 총격 소리를 들은 노 장관은 공관과 가까운 단국대(지금의 한남더힐 위치)로 피신하여 가족들을 부하에게 맡긴 뒤 육군본부 B-2 벙커, 한미연합사령부를 오가다 결국 국방부에서 제1공수특전여단에 붙잡혔습니다.

계엄사령관에 대한 지휘감독권한이 있던 국방부장관은 대통령 재가를 받으려는 전두환이 애타게 찾던 인물입니다. 반란을 파악했던 제3군사령관 이건영 장군과 수도경비사령부 장태완 장군도 국방부장관의 병력이동 허가가 필요했기에 애타게 찾았습니다. <12.12 사건 보안사 녹음기록>에 따르면, 그는 병력이동을 금지하는 명령만 내렸을 뿐 반란을 진압하라는 명령은 내리지 않았습니다. 이는 결국 반란군만 병력을 서울로 진출시키고 반란 성공으로 이어졌습니다.

노재현 국방부장관은 육사 3기 출신으로 한국전쟁을 겪었고, 육군참모총장과 합동참모의장을 역임했습니다. 그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겁쟁이로 연출되었지만, 장태완 장군에게 내린 마지막 명령은 단호했습니다. "가만히 있어! 시키는 대로 해. 절대 충돌하지 말라!" 이에 결국 장 장군은 진압을 포기하고 "장관의 명령이라면 그대로 실시하겠습니다. (…) 포기하겠습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부하들에게 체포됐습니다.

그는 12월 14일 국방부장관에서 사임했지만, 반란군 못지않은 예우를 받았습니다. 백선엽에 이어 1981년부터 한국종합화학공업 사장 등 공기업 사장을 역임했고, 1991년에는 한국자유총연맹 총재를 지냈습니다. 그리고 2019년 9월 25일 사망하여 국립대전현충원 장군2묘역 523호에 안장됐습니다.

신군부에서도 승승장구한 윤성민 육군참모차장
  
국립대전현충원 장군2묘역 443호에 안장된 윤성민 육군참모차장
 국립대전현충원 장군2묘역 443호에 안장된 윤성민 육군참모차장
ⓒ 정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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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신 분은 오국상 장관 못지않게 민성배(배우 유성주) 육군참모차장이 답답했을 겁니다. 당시 육군참모차장 윤성민 중장을 모티브로 한 배역으로 정승화 총장이 납치돼 육군을 지휘할 수 없는 상황에서 육군참모총장 직무대행으로 반란군을 진압할 책임을 진 지위였습니다. 하지만 우유부단하고 끝에 가서는 반란군의 신사협정에 속아 마지막 희망인 제9공수특전여단을 되돌려 보내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에게도 핑계는 있습니다. 상관인 노재현 국방부장관이 군사 출동을 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고 부재했고, 수도권 소요사태를 진압하기 위한 충정부대인 26보병사단과 수도기계화보병사단의 병력출동을 위컴 한미연합사령관이 허가해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같은 충정부대인 수도경비사령부 장태완 사령관과 특수전사령관 정병주 사령관은 반란을 저지하고자 끝까지 애썼다는 점을 생각할 때 지휘관으로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진압군에서 실질적 최고지위에 있던 그는 전두환 신군부 반란군이 정국을 장악한 뒤, 다른 진압군과 다르게 승승장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반란 직후 제1야전군사령관에 취임하여 대장으로 진급했고, 1981년에는 합동참모의장을, 1982년에는 국방부장관으로 임명되어 전두환 정권에서 최장기 국방부장관을 지냈습니다.

이후 한국석유개발공사 이사장, 대한방직협회장 등을 역임한 그는 2017년 11월 6일 사망하여 국립대전현충원 장군2묘역 443호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노재현 국방부장관과 윤성민 육군참모차장은 반란군이 아니었으며, 이후 12.12 재판 당시에도 전두환 신군부의 하극상에 대한 증언에 나서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반란을 적극적으로 막아야 했던 책임자였음에도 무기력한 대응으로 우리나라의 군부독재가 연장되게한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이 현충원에 잠들기 전, 변명보다는 반성을 하는 모습을 보였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참고자료
구 계엄법(1981. 4. 17. 법률 제 3442호 계엄법으로 전문개정되기 전의 것)
보안사령부, <제5공화국 전사>, 1982
12.12 사건 보안사 녹음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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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서울의봄, #1212, #전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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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통일교육문화센터 기획홍보팀장, 유튜브 대전통 제작자, 前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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