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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전남 완도군 고금면 윤동마을 은행나무에 이어 두 번째로 은행나무 이야기를 쓴다. 윤동마을의 은행나무가 독립개체로 이순신 장군의 호국의 혼이 들어있다면 이번에 다루는 은행나무는 백여년된 수십그루의 은행나무가 군락을 이루며 가을이면 은행잎 비를 내리는 곳이다. 

은행(銀杏)은 원래 우리나라와 중국에서만 자라는 나무로 알려져 있다. 자라기도 더디지만 까다로운 것은 암수 나무가 있어야 열매를 맺는 자웅이주(雌雄異株) 식물이다. 봄부터 가을까지 푸르름을 자랑하던 잎은 가을이 되면 아주 샛노랗게 물들어 누구나 좋아하고, 나무는 켜놓으면 무늬가 촘촘하고 아름다워서 예로부터 바둑판으로 널리 이용돼 왔다. 현대에 들어서는 병충해와 공해에 강하다하여 가로수로 많이 심었으나 열매 특유의 고약한 냄새로 외면받고 있다. 

근동에서는 해남 윤씨의 종택(宗宅)인 녹우당(綠雨堂)의 은행나무가 유명하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강진 병영면 성동리의 은행나무는 우리나라를 유럽에 널리 알린 헨드릭 하멜이 이 나무아래서 고향을 그리워하며 지냈다고 해서 유명해진 나무이기도 하다.
   
"국가의 백년계획은 교육을 통한 인재육성에 있다"

우리 완도군 군외면 불목리에는 100여 년 전 선각자 한분이 계셨다. 소남 김영현(小南 金榮泫)선생이다. 선생은 1910년 서울 융희학교를 졸업하고 1911년 고향인 고금도로 낙향해 고금보통학교에서 젊은이들에게 신신교육을 가르쳤다. 

소남 선생은 고금보통학교에서 청소년을 가르치다 성인이 되자 불목리에 정착한 뒤 농촌 개몽 운동을 하고자 1923년 군외면 교인리에 사립교인학교를 세웠다.  

하지만 교인학교는 일제에 의해 10여년만에 폐교당하고 1934년 군외면 불목리로 옮겨 교명을 바꾸고 군외공립보통학교 부설 영창간이학교로 문을 여니 오늘날의 군외동초등학교이다. 오늘날 푸르름을 자랑하며 자라고 있는 은행나무가 연창간이학교가 개교할 때 심은 은행나무라고 한다. 군외면 불목리에 자리 잡은 군외동초등학교에는 천경도서관이라는 기적의 도서관이 있다. 

지금은 학교가 폐교돼 도서관이 문을 닫았지만 천경도서관은 영창간이학교에서 공부한 학산 김윤석(鶴山 金允錫 1921~2002 군외면 영풍리 출신) 천경해운(天鯨海運) 회장이 모교의 발전과 후학들의 향학열을 북돋아 주기 위해 1988년에 사비로 신축해 기증했다.

1층은 대강당이고 2층은 도서관으로 신축당시에는 시골학교에서 보기 드문 시설이었다.      

이 앞을 지키는 수호신이 있으니 수령 100여 년이 넘는 은행나무 25그루이다. 사립교인학교가 1933년 폐교되고, 이후 일제에 의해 1934년 오늘의 자리로 이전돼 영창간이학교로 재개교하면서 이때 은행나무가 심어졌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학교에 은행나무를 심은 것은 공자가 행단(杏壇 중국에선 살구나무로 인식) 아래서 제자들을 가르쳤다는 것에서 나왔다.

그래서 행단은 학교를 상징하고 조선시대 공립교육기관인 향교나 문묘에도 많이 심었다, 서울 성균관대에는 성균관이 만들어 질 때 심었다는 은행나무 두 그루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잘 보존되고 있다.  

은행나무는 워낙 오래 사는 나무라 수령이 100여 년이 넘어도 은행나무로서는 애기나무이지만 그래서 불목리 은행나무는 미래가 더 밝아 우리가 잘 지키고 가꿔야 할 우리 지역의 훌륭한 경관자원이자 문화유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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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은행나무 군락지는 매년 가을이 되면 완도읍의 모든 유치원 어린이들이 은행잎 비를 맞기 위해 찾는 미래 세대의 명소 중 명소이다. 우리나라에는 수백 년을 살고 있는 몇 그루의 은행나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보호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군락지를 이룬 곳은 우리나라 전체를 찾아봐도 이곳만큼 한 곳이 없다. 다만 이웃나라 일본의 홋카이도대학에 은행나무(イチョウ並木) 가로수길이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이곳은 길이가 400여 미터에 달하고 70그루 정도가 자라고 있는데 홋카이도대학 역시 역사가 140여 년 정도여서 불목리의 은행나무와 나이가 비슷하다. 이 은행나무 거리는 홋카이도서 아름답기로 유명해 국내외에서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고 매년 11월이면 콘요우사이(金葉祭)라는 은행나무 축제를 열기도 한다.  

불목리의 은행나무 군락은 아직까지 사람의 손을 타지 않아 목치기를 당하지도 않았고 태풍으로 큰 가지가 부러지거나 꺾이지도 않았다. 100여 년 이상을 자기가 자라고 싶은 방향으로 가지를 쭉쭉 뻗으며 잘 자라왔다.

아무튼 이 은행나무가 누군가의 잘못으로 또는 소수인의 집단민원으로 목치기를 당하는 슬픈일이 없이 이 다음 또 그 다음 세대까지도 잘 자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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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풍호(1971년 군외동초등하교 20회 졸업)씨를 만났다.

1960년대 군외동초등학교를 다닌 김풍호(전 완도문화원 부원장)씨는 불목리에서 나고 자란 불목리 토박이이다. 소남 김영현 선생의 후손이기도 한 김씨는 형제자매들이 모두 군외동초등학교를 졸업했다고 한다. 

"우리가 학교다닐 때는 1960대여서 그때는 특별한 놀거리도 없고 봄부터 가을까지 은행나무 아래가 놀이터나 마찬가지 였어요, 항상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니 그냥 친구들하고 구슬치기나 오징어 놀이를 하는 그런 장소였습니다, 어릴 때는 이렇게 좋은 나무가 될지 몰랐어요."

또 그때는 어린 눈으로 보니 나무가 크기는 컷지만 이렇게 아름드리나무가 될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아주 편안한 그늘이자 놀이터였었어요. 가을운동회 때는 꼭 이 은행나무 아래서 점심을 먹었습니다."

김씨는 은행나무가 잘 보호돼 후세들이 물려받을 수 있는 경관자원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유영인 다도해해양문화연구원 원장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완도신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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