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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에는 섬 이름과 행정지명이 다른 곳이 몇 군데 있다.

사람들이 흔히 금일도(金日島)라고 부르는 평일도(平日島)도 그 중 하나이다. 국립지리원에 섬 명칭이 정확히 평일도로 등록되어 있는데 행정에서 조차 고유 명사인 평일도를 외면한 채 금일도로 사용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평일도라 하면 사실 완도사람들도 조금은 생소한 부문이 있다. 이번 글은 평일도(금일읍) 월송마을의 아름다운 소나무방풍림(松林)에 대해 글을 쓰고자 한다. 우리나라에는 기념물로 지정된 소나무도 있고 또 유명한 소나무 숲도 많다, 바닷가 방풍림으로는 근동에 해남 송호리 해수욕장의 송림이 유명하고, 하동의 섬진강 송림은 섬진강을 품고 있다, 또 울진의 금강송림은 조선시대부터 정책적으로 가꾸어져 오늘날은 휴양림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이러한 숲들이 인위적으로 가꾸어진 반면 월송마을 송림은 자연적으로 형성되어 방풍림으로서 섬 주민들에게 큰 혜택을 주고 있다. 또한 송림속에 우뚝 솟은 당목(堂木)은 섬 주민들의 정신적인 지주로서 그 역할을 다 해왔다.    

약산면 당목항(堂木港)에서 철부도선을 타고 20여분을 가면 다시마의 고장 금일읍의 일정항(日亭港)에 도착한다. 일정항은 해상교통이 발달되자 최근에 개발 된 연안항으로 육지 나들이를 위한 평일도 주민들의 교통 요충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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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정항에서 차를 타고 20여분 달리면 월송(月松)마을이 나온다. 월송마을은 마을 이름 그대로 소나무에 걸린 보름달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월송이라 하였다고 한다. 월송마을 주민들은 예로부터 자녀들의 교육에 힘썼는데 근대 이전 평일도에 있던 7개 서당 중 두 개가 이곳에 있었다고 한다. 

학남재(學南齋)와 삼락재(三樂齋)이다. 학남재의 훈장은 정기범이었으며. 또 하나 삼락재 훈장은 이규민이었다. 마을의 북동쪽 서당골이라 불리는 곳에는 송호재(松湖齋)가 있었다. 송호재는 조선조 숙종 대에 한종국(韓宗國)이 육지에서 이거하여 후학을 양성하였다고 전해지며 몇 해 전까지 지역의 유림들이 송호재 옛터에 숭덕단(崇德壇)을 짓고 매년 4월 15일 한종국과 김찬배(金燦培) 두 분을 모시고 송호제(松湖祭)를 지냈으나 여러 여건상 지금은 상화전(上花田)마을의 평호단에서 다른 분들과 함께 신위를 모시고 있다고 한다.

월송마을에서는 마을 입구를 '불등말'이라 부르고 소나무 방풍림이 심어진 지역을 '불등'이라고 부른다. 

그 연원에 대해 아는 사람은 없다. 소나무 방풍림은 불등말에서 아릇몰(마을 남쪽 끝)까지 길이 약 1km에 폭 30~50m에 걸쳐 수령 200~350여년의 소나무 500여 그루가 마을 앞 바닷가를 감싸고 있는데 이 소나무들이 거친 바닷바람으로부터 마을을 보호하고 있다. 특히 월송마을 앞바다는 만으로 형성되어 바다가 잔잔한데 소나무와 바다가 어우러진 석양 노을이 너무나 아름다워 최근에는 사진작가들의 발길이 멈추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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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사람들은 마을 앞 불등(소나무 숲)을 '연애 불등'이라고 부른다. 전화도 귀하고 지금처럼 스마트폰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 불등은 청춘남녀들이 무언(無言)으로 만날 수 있는 장소였다고 한다. 또 불등웃몰(마을의 위쪽)에서는 정월 초하룻날 당제를 모시는데 당제를 모시고 돌아 올 때는 절대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는 전설이 있다. 만약 뒤를 돌아다보면 쥐도 새도 모르게 귀신에게 잡혀간다는 무시무시한 전설이 전해온다. 그러나 이러한 당제도 메구를 칠 사람이 없어 몇 해 전부터는 모시지 않는다고 한다. 

월송리가 탯자리인 변남일(85. 월송마을 노인회장, 사진)은 이 불등소나무 만큼 좋은 소나무는 여태 보지 못했다고 한다. 

″나는 여그서 나고 여그서 커서 지금까지 고향을 지킴서 살고 있어. 우리가 젊었을 때는 여그 불등하고 백사장이 그라고 좋았어. 그때는 바다도 깨끗하고 백사장에 모살이 많앴그등. 그란디 어찌게 된 것인가 지금은 모살이 으드로 다 떠낼러 가불었어.

우리가 청년 때는 여름이먼 남녀노소 동내 사람들이 불등으로 다 모테. 왜근고니 하먼 불등 백사장에는 모구가 한나도 없어 집에는 모구가 있어도 여그는 없당께. 그랑께 저녁밥만 묵으먼 애기들은 엄니들 따라오고 다 여그로 모테는 것이여.

그라다가 밤 10시나 되먼 여자들하고 애기들은 집으로 들어가고 남자들은 여그 백사장에다가 가마니나 거적을 깔고, 또 어떤 사람은 밀집을 가져와서 깔고 여그서 자고 아침이먼 집으로 가고 한마디로 여름을 여그 불등하고 백사장에서 보냈다고 보먼 되아.

옛날에 우리가 젊었을 때 불등에서 많이 놀았거등, 우리마을이 킁게 그때는 청춘 남녀들이 겁나게 많애. 그래서 같이 놀다보먼 서로 눈이 맞어부러 그라먼 누구하고 누구는 연애한다네 하고 억지로 소문을 내부러 그라먼 인자 그때는 자동적으로 결혼을 하게 됐어. 그래서 불등을 연애불등이라고 해.″  


이곳에는 달빛에 젖은 아름다운 불등 소나무를 노래한 '월송의 달밤' 일명 월송가(月松歌)가 전해온다. 마을에 있는 금일동초등학교 박상운 교장선생이 작사와 작곡을 했다. 지금은 많이 잊혀졌지만 월송마을 주민들은 한때 트로트 풍인 이 월송가를 누구나 흥얼댈줄 알았다고 한다.  

강남 길 수평선에 황혼 어린 밤들이여
달빛 녹는 백사장에 휘늘어진 노송들 
은파 연 월 뱃노래에 가물거린 녹 소리
달에 젖은 마음이야 물에 젖은 마음이야 
아~ 웃어라 
아~ 월송의 달밤이여 


당목항을 향하는 뱃전에서 『월송의 달밤』이 이명(耳鳴)으로 들려왔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완도신문에도 실렸습니다. 글쓴이는 유영인 다도해해양문화연구원 원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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