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23일 오후 서울 용산구 하이브 사옥.

사진은 23일 오후 서울 용산구 하이브 사옥. ⓒ 연합뉴스

 
지난 22일, 케이팝 산업 역사상 최대 규모의 경영 분쟁이 발생했다. 바로 '뉴진스의 어머니'로 알려진 어도어 민희진 대표와 하이브 간의 경영권 갈등이다. 4세대 최고 인기 걸그룹 뉴진스를 보유한 어도어는 하이브 레이블에 소속된 하이브의 자회사로서, 현재 하이브가 80%, 2대 주주인 민 대표가 18%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하이브가 제기한 문제는 민 대표를 비롯한 어도어의 경영진이 외부 투자를 유치해 하이브로부터 경영권을 탈취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에 하이브는 전격 감사권을 발동해 관련 증거를 확보하는 절차에 돌입했으며, 어도어 주주총회를 소집하고 민 대표의 사임까지 요구하고 있다.

같은 날 민희진 대표는 곧바로 반박문을 내놓았는데, 이번 사태의 핵심은 지난달 데뷔한 하이브 산하 레이블 빌리프랩 소속 신인 걸그룹 아일릿(ILLIT)이 뉴진스를 카피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민 대표의 주장에 의하면 아일릿은 "헤어, 메이크업, 의상, 안무, 사진, 영상, 행사출연 등 연예활동의 모든 영역에서 뉴진스를 카피하고 있"으며, 이는 똑같은 산하 레이블이라는 미명 하에 "뉴진스와 어도어의 독립적인 성취를 탈취하는 행위"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문제를 하이브 측에 제기하자 이를 인정하지 않은 하이브가 경영권 탈취 등의 명목으로 언론 플레이를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 민 대표의 입장이다.

과연 어느 쪽의 주장이 진실일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현 시점에서 표면상으로 드러난 사실은 '아일릿이 뉴진스를 카피했다'는 민 대표의 주장뿐이다. 그렇다면 지금 가장 먼저 논의되어야 할 명제는 바로 이것일 터. "정말 아일릿은 뉴진스의 표절작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

아일릿과 뉴진스의 콘셉트 측면에서의 차이점

콘셉트 측면에서 뉴진스와 아일릿의 핵심 키워드는 '키치'로 동일하다. 하지만 그것을 구현하기 위한 방법론이 다르다. 뉴진스의 경우 Y2K 문화를 빌려왔다. 낡은 비디오카메라에 담긴 "Ditto" 뮤직비디오 속 소녀들, 팬 소통 어플 포닝(Phoning)의 레트로풍 UI, 인기 어린이용 애니메이션 파워퍼프걸 캐릭터로 변신한 멤버들까지. 특유의 정돈되지 않은 색감과 어설픈 그래픽 디자인, 열화된 화질 등 컨템포러리적 테이스트와는 거리가 먼 Y2K의 감각은 역설적으로 키치의 미학에 정확하게 명중했다.

말하자면 뉴진스는 2000년대의 대한민국을 담은 흑백사진에 키치의 물감을 칠해 복원한 존재다. 따라서 대한민국의 2000년대를 그리워하는 사람이라면 뉴진스에게 흥미를 가지게 된다. 그 다음에는 대중문화 산업에서 가장 검증된 코드 중 하나인 키치를 통해 그 흥미를 아이돌에 대한 규격화된 팬심으로 변환하여 증폭시킨다. 이러한 전략이 뉴진스가 일반적인 아이돌과는 달리 범세대적인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비결이다.

반대로 아일릿이 키치의 모티프를 가져온 모델은 바다 건너 일본에 있다. 아일릿의 데뷔 프로모션 캘린더 영상은 이례적으로 애니메이션 형태로 제작되었는데, 뉴진스의 파워퍼프걸 콜라보레이션과는 달리 전형적인 일본 애니메이션을 닮은 모양새다. 더 정확히는 90년대 유행했던 <달의 요정 세일러문>, <사랑의 천사 웨딩피치> 같은 여아용 마법소녀물의 무드를 겨냥하고 있다. 뉴진스가 옛 현실 속의 소녀들이라면, 아일릿은 옛 만화 속의 소녀들이다.

이러한 지향점은 패션, 헤어, 메이크업 등 비주얼적 요소를 통해 종합적으로 구현된다. 의상 면에서는 2024년 패션 트렌드로 떠오르는 걸코어와 바비코어를 적극 차용해 걸리쉬한 느낌을 강조하고 있다. 이에 더불어 프릴 원피스나 퍼프 스커트, 러플 레이스 스커트처럼 풍성하고 소프트한 질감의 의상을 매칭하고, 부드러운 핑크와 스카이블루 색감을 중심적으로 활용하여 러블리하고 몽환적인 인상을 더하고 있다. 일반적인 방식과는 달리 핑크 블러셔를 볼 전체에 넓게 펴바르는 독특한 메이크업은 또 어떠한가. 곱게 땋은 머리와 합쳐져 마치 애니메이션 속 캐릭터가 그대로 튀어나온 것 같은 신비로운 느낌을 주고 있다.

빌리프랩이 구현하고자 하는 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소녀들'이다. 세일러문이 날아다니고 고양이가 말을 하는 마법소녀물에 등장하는, 다분히 기호화된 소녀의 이미지다. 아일릿이라는 캐릭터는 세기말 일본 애니메이션의 컨텍스트 속에서 존재한다.

반면 뉴진스가 표방하는 것은 '현실에 존재할 것 같은 소녀들'이다. 친구들과 방과후에 웃으며 하교를 하고, 초록빛 운동장에서 춤을 추고, 비디오카메라로 함께 동영상을 찍으며 꺄르르 웃는 그런 평범한 소녀들 말이다. 그래서 뉴진스는 옅은 메이크업과 긴 흑발의 생머리로 나타났고, 주로 스포티하거나 활동하기 편한 의상을 입고 무대에 올랐다.

이처럼 아일릿과 뉴진스는 명백히 정반대의 방법론을 통해 상이한 영역에서 캐릭터빌딩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 단지 그 과정에서 두 팀의 결과물이 '키치'라는 지점에서 교차하는 바가 있어 얼핏 보기에 닮아 보이는 것뿐이다.

아일릿과 뉴진스의 음악적 측면에서의 차이점
 
 그룹 아일릿.

그룹 아일릿. ⓒ 빌리프랩

 
음악적인 측면은 어떨까. 이 부분에서도 아일릿은 뉴진스와 많이 다르다. 아일릿과 뉴진스가 가장 명백하게 구별되는 지점이 음악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뉴진스의 음악세계는 저지 클럽과 드럼앤베이스, UK 개러지 등 댄스 뮤직을 중심축으로 회전하고 있는 반면, 아일릿의 데뷔곡 "Magnetic"이 차용한 플럭앤비 장르의 뿌리는 힙합/알앤비다. 단적으로, 박자를 복잡하게 쪼개며 변칙적인 드럼 패턴을 보여주는 뉴진스의 음악과 정박으로 묵직하게 내려꽂는 아일릿의 악곡 구조는 판이하게 다르다.

조금 더 집중해 귀를 기울여보면 더 많은 차이점들이 속속들이 발견된다. "Magnetic"의 베이스는 걸그룹의 노래로서는 이례적일 정도로 매우 두껍고 어택감이 강조되어 있다. 그에 비해 뉴진스의 음악에서 사용되는 베이스의 질감은 상대적으로 경량화되어 있고 유연하다. 또한 아일릿의 음악이 멜로디보다는 비트 중심인 반면, 뉴진스는 "Hype boy"와 "Super Shy"로 대표되는 캐치한 멜로디와 직관적인 훅으로 승부를 본다. 이처럼 상이한 두 그룹의 음악을 이지-리스닝이라는 모호한 단어로 뭉뚱그려 '아류작'으로 치부한다면 난감할 뿐이다.

다만 높낮이가 크지 않은 코드 진행으로 부드럽고 담백한 맛의 멜로디를 짜는 기조는 두 팀 모두 동일한데, 이는 뉴진스 역시 영국의 베드룸 팝 아티스트 핑크팬더레스(PinkPantheress)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고유한 작법은 아니다.

굳이 아일릿이 뉴진스에게 영향을 받은 듯한 점을 꼽자면, 아직 케이팝에서 시도되지 않은 해외의 트렌디한 마이너 장르들을 과감하게 수급해 전면적으로 내세우는 아이디어 정도다. 아일릿의 음악이 뉴진스와 비슷한 게 아니라, 음악을 선별하는 프로세스가 비슷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점은 빌리프랩과 어도어가 같은 레이블임을 감안했을 때, 모기업인 하이브가 음악 사업 측면에서 추구하는 핵심 가치가 동일하기에 발생하는 범위 안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민희진 대표의 주장은 납득하기 어렵다

이처럼 음악과 콘셉트 양 측면 모두에서 아일릿과 뉴진스는 구별되는 지점들이 명백하기에 민희진 대표의 주장처럼 아일릿을 뉴진스의 단순한 카피 혹은 아류작으로 치부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사실 관계를 떠나 아직 어린 신인에 불과한 아일릿을 콕 집어 자극적인 어조로 공격한 것은 민 대표의 실언이다.

하지만 민 대표의 발언 이전부터 두 그룹이 유사하다고 느끼는 시선들이 존재했다는 사실 역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대중음악은 엄연히 대중을 상대로 하는 산업인 만큼 대중이 느낀 바를 경청하고 참고해야만 한다. 분명 두 그룹 간에 유사하다고 느낄 수 있는 지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고, 빌리프랩은 그러한 지점들을 대중이 납득하고 구별할 수 있게 더 노력했어야만 한다. 이러한 대중의 피드백을 토대로 아일릿의 음악세계가 더욱 견고해지기를 기대해 본다.

경영권 분쟁의 향방과는 별개로 향후 아일릿과 뉴진스가 이 위기를 딛고 더욱 멋진 음악으로 돌아와 다시금 케이팝 산업의 질적 발전을 이끄는 맹아로 활약해 주기를 바란다.
케이팝 음악 뉴진스 하이브 민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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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대중음악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는 박정빈입니다. 연세대학교에서 영어영문학과 문화비평학을 전공했고, 지난해에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에서 수학했습니다. 여성동아, IDOLE 등 다양한 웹진과 잡지에 대중음악 칼럼을 기고해 왔습니다. (문의: bin5483548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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