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4.23 11:04최종 업데이트 24.04.23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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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요범 4·3 희생자 유족회 고문 학살사건 당시 1년 5개월 젖먹이로 어머니 등에 업혀 있었다. 북촌리 피해를 조사, 기록하여 세상에 알려왔다. ⓒ 황의봉

 
"한라영산이 푸르게/ 푸르게 지켜보는 조천읍 북촌마을/ 4·3사태 때 군인 한두 명 다쳤다고/ 마을 사람 모두 불러 모아 무차별 난사했던/ 총부리 서슬이 아직도 남아 있는/ 풀 한 포기 자라지 못할 너븐숭이 돌무덤 앞에/ 목이 메인다
아직 눈도 떠보지 못한 아기들일까/ 제대로 묻어주지도 못한/ 어머니의 한도 함께 묻힌 애기 돌무덤/ 사람이 죽으면/ 흙 속에 묻히는 줄로만 알았던 우리 눈에는/너무 낯선 돌무덤 앞에 목이 메인다/목이 메인다."(양영길, <애기무덤> 중에서)


곳곳에서 인간 사냥의 대학살극이 벌어지고, 수많은 마을이 불길에 사라져간 1948년 제주섬. 북촌, 너븐숭이, 애기 돌무덤은 이 제주4·3의 비극을 상징하는 장소이자, 소설 <순이삼촌>의 현장으로 널리 알려진 '명소'가 됐다.


76주년 4·3 추모제가 지나갔지만 북촌리는 여전히 그날의 참상을 되새기며 용서와 평화의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최근 4·3 희생자 북촌리 유족회가 주최한 3차례의 강연회에 연사로 나선 황요범 제주4·3 희생자 유족회 고문을 만났다.

초등학교 교장을 마지막으로 43년간 교단을 지킨 황요범 고문은 북촌리가 고향으로 지금까지 이곳에서 살고 있다. 1년 5개월짜리 젖먹이로 엄마 등에 업혀 북촌리 학살사건 현장에서 살아남은 이래 이 전대미문의 사건을 조사, 기록하고 세상에 알리는 데 평생을 바쳐왔다.

할아버지 아버지를 비롯해 6명의 친·외가 가족을 잃었고, 사건 현장이었던 북촌국민학교를 졸업했으며, 이 학교에 교사로 근무하기도 했다. 은퇴 후에는 4·3과 북촌 관련 책을 펴내고, 4·3 평화·인권 교육 명예교사 회장으로 자라나는 세대에게 4·3을 제대로 알리는 일에 진력하고 있다.

북촌리 학살사건의 전말  

황요범 고문과의 인터뷰는 북촌리 학살사건의 전말을 듣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에 따르면 북촌리 사건은 세 차례에 걸쳐 확대된다. 첫 번째가 우도 배 사건이다.

"1948년 6월 16일 밤, 북촌포구에서 경찰관 2명 피랍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우도에 근무하던 순경 세 가족 13명이 배를 타고 제주항으로 가던 중 돌풍이 몰아쳐 북촌포구에 정박하게 됐는데, 밤중에 무장대가 침입해 경찰 두 사람을 납치해 간 겁니다. 사건 발생 3일째에 조천지서(지금의 연북정) 앞바다에 사체 한 구가 떠올랐어요. 바로 납치됐던 우도지서장 양태수 경감이었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후 진남호 순경이 야산에서 죽은 채 발견됐고요.

이 사건으로 군인과 경찰들이 하루도 거르지 않고 집집마다 수색하고, 젊은이들을 잡아다가 고문하는 등 검거 열풍이 이어졌습니다. 자연히 많은 마을주민이 굴이나 산으로 피신했어요. 북촌은 이때부터 '폭도 마을'로 낙인찍히고 '빨갱이 마을'이란 누명이 씌어 사사건건 지목 대상이 되고 만 것입니다."


두 번째 사건은 '민보단 청년 23명의 죽음'이다. 우도 배 사건이 발생한 5개월 후, 초토화 작전이 극에 달하던 12월 16일(음력 11월 16일)에 벌어진 사건이다.

"이날 오후 사람들을 가득 태운 군 트럭 한 대가 마을을 지나 동쪽으로 달리고 있었는데, 차 안에는 전날 군부대로 불려 갔던 북촌마을 청년들이 타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민보단 청년들로 낮에는 군이나 경찰을 도와서 토벌 작전에도 나갔고 밤에는 마을의 안전을 위해 보초를 서고 야경도 돌았던 사람들입니다. 얼마 안 지나서 수십 발의 총성이 들려왔고, 서쪽으로 빈 차가 지나가는 것이 목격됐습니다.

민보단 청년들이 이웃 동복마을과의 경계인 낸시빌레에서 집단으로 학살당한 것이에요. 총소리를 듣고 마을 사람들이 찾아가 보니 오목한 밭 안에 갈산절산(제주어로, 이리저리 아무렇게나 흐트러져 있는 모양) 즐비하게 청년들이 쓰러져 있었다는 겁니다. 이날 끌려간 24명의 민보단 청년 가운데 이상영 씨만 허벅지에 총상을 입어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올 수 있었습니다.

이상영 씨의 증언에 의하면 5월 10일 선거에 반대했으며 폭도와 내통하고 있다는 터무니없는 생트집을 잡아 하룻밤 감금했다가 낸시빌레로 끌고 간 것이라고 합니다. 이 민보단 학살사건에서 저의 아버지와 샛아버지(둘째 아버지)도 총에 맞아 돌아가셨습니다."
 

제주4·3 기간에 단일사건으로 최대의 희생자가 발생한 북촌리 학살사건은 민보단 청년들이 떼 죽음을 당한 날로부터 한달 여 후인 1949년 1월 17일(음력 1948년 12월 19일) 새벽부터 시작됐다. 우도 배 사건으로부터는 7개월이 지난 시점이다. 황요범 고문의 설명은 계속된다.
 

학살 당일 북촌국민학교 상황도 황요범 고문이 생존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북촌리 대학살이 시작된 북촌국민학교의 당시 상황을 표현한 그림. 세 방면에서 기관총이 주민들을 겨누고 있다. ⓒ 황요범

 
"그날도 여느 때처럼 마을 어귀 초소(보초막)에서 노인 9명이 보초를 서고 있었습니다. 한겨울 새벽에 동쪽에서 달려오던 자동차의 불빛이 초소를 막 지나나 싶더니 너븐숭이 쪽에서 심상치 않은 여러 발의 총소리가 들려왔다고 합니다. 지금의 북촌초등학교에서 서쪽으로 100m쯤 떨어진 곳입니다. 병력을 싣고 함덕국민학교에 주둔하고 있던 2연대 3대대 (일부 병력이) 본부로 이동 중에 무장대로부터 피습을 당해 군인 2명이 죽은 것입니다.

총소리가 잔잔해지더니 느닷없이 군인 셋이서 초소에 들이닥쳐 다짜고짜 화톳불을 걷어차며 노인들을 후려치고 발길질을 해댔다고 합니다. 날이 밝자 아홉 노인은 들것을 만들어 군인 시체 2구를 함덕국민학교에 운구해 간 뒤 연단 옆에 뉘고 나서 무릎을 꿇었다고 해요. 운동장에는 완전 무장한 군인 200∼300명이 모여 있었고, 조총을 울리며 장례 의식을 거행하더라는 겁니다.

권총을 찬 대장이 연단에 올라서서 '새벽에 아군 둘이 폭도 마을 북촌에서 전사했다, 이 울분을 참을 수 없다, 폭도 마을로 가 쥐새끼 한 마리 남기지 말고 싹 쓸어버려라'는 서슬푸른 호령을 했어요. 그리고 무릎 꿇고 있던 9명의 노인을 함덕국민학교 부근 갈매뭍으로 끌고 가 매질을 한 뒤 사살하고 말았습니다. 저의 할아버지도 이때 죽임을 당하셨고, 큰외삼촌(이군찬)은 사살 직전에 아들이 순경이라고 밝혀 살아나셨고요. 이날 새벽부터 일어난 일이 바로 이군찬 외삼촌의 증언으로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북촌마을에 당도한 군인들은 마을을 포위하고 무장대나 젊은이들이 숨어 있을 만한 곳을 샅샅이 뒤지면서 집마다 불을 질렀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을 모조리 북촌국민학교로 내몰았다. 당시 학교에서 벌어진 일을 황 고문은 이렇게 전한다.

"학교에 모인 마을 사람들은 공포에 떨 수밖에 없었습니다. 학교 주변에 이미 백여 명의 군인이 진을 치고 마을 사람들을 포위하고 있었는데, 세 방향에서 기관총을 겨누며 도주를 차단했어요. 군경 가족과 민보단 가족을 한편으로 구분해 놓은 뒤, 나머지 사람들은 40∼50명씩 인근의 야산으로 끌고 나가 사살하는 만행을 저지른 것입니다. 현기영 작가의 소설 <순이삼촌>에 당시의 참혹했던 모습이 자세히 묘사돼 있습니다.

저는 그때 두 살배기 아기였는데, 어머니 등에 업혀 학교 마당 무리 속에 휘말리고 있었습니다. 죽일 자와 살릴 자로 구분하여 집결시키고 있을 때 저희는 민보단 가족이어서 살아남을 수 있었어요.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혼란이 극심하던 순간, 교문 쪽에서 총성이 들렸습니다. 한 아기엄마가 군경 가족들 쪽으로 몰래 꿩 걸음으로 걷다가 총에 맞아 뒹굴게 되는 일이 벌어졌어요. 바로 저와 동갑내기였던 한경림의 어머니였습니다. 아기를 안은 채 쓰러진 어머니의 머리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오고, 피에 젖은 홑적삼 사이로 젖가슴이 드러났는데, 배고파 우는 아기가 젖가슴에 매달려 필사적으로 젖을 빨더라는 겁니다."


당시 북촌마을의 인구가 1200여 명 정도였음을 감안하면 1000명 이상이 학교 운동장에 끌려 나와 생사의 갈림길에 섰고, 절반 정도는 죽음을 면치 못했던 것으로 추산해볼 수 있다. 무더기로 학교 밖으로 끌려 나간 사람들은 학교 동쪽의 당팟, 서쪽의 너븐숭이, 탯질 등지에서 집단학살을 당했다. 제주4·3 기간에 가장 큰 인명피해를 당한 곳이 바로 북촌과 가시리, 노형리였고, 하루에 몰살당한 규모로는 북촌이 가장 피해가 컸다.
 

북촌 희생자 위령비 제막식 북촌리 주민들은 집단학살이라는 엄청난 비극을 겪었음에도 침묵을 강요당하다가 2008년 1월에서야 학살 현장에 위령비를 건립할 수 있었다. ⓒ 황요범

  
함덕에 주둔했던 2연대 3대대는 악명 높은 극우 조직인 서북청년단으로 구성된 부대여서 더욱 포악했다. 대학살극은 오후 4∼5시경 뒤늦게 나타난 상급 지휘관의 "사살 중지!" 명령으로 일단 멈춰졌다. 이어서 "오늘, 너희들은 다 죽여야 했는데, 일단 살려둔다. 차후에 폭도들과 내통하는 자가 있을 시는 씨를 말릴 것이다. 내일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함덕 군부대로 나오라"라는 소개령이 내려졌다.

광란의 학살극이 막을 내리고 군인들이 돌아가자 살아남은 사람들은 가족들의 생사를 확인하고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밤새 학살터를 헤매야 했다. 황요범 고문이 전하는 당시 상황은 너무도 참혹한 광경이어서 짧게 요약해 본다.

"땅거미가 드리우는 저녁 무렵 앞다투어 시체를 찾아 나섰습니다. 학살터엔 쓰러져 죽은 사람들이 마치 뽑아 놓은 무처럼 널려 있어 누가 누구인지를 분간하기 어려웠어요. 사람이 죽은 후 시간이 흐르면 혈색이 완전히 변해 입은 옷을 보고 구분했다고 해요. 시신을 찾으면 우선 날까마귀들이 달려들어 얼굴을 훼손하지 못하도록 윗도리로 얼굴을 감싸거나 시신을 땅에 엎어 놓았다고 합니다.

이튿날 대부분의 시신은 찾았지만 묻을 방법이 없었습니다. 날이 밝자 시신을 밭 한 모퉁이에 모아 놓고는 나뭇가지나 검불로 덮어서 시신이 훼손되지 않도록 조치하고 돌멩이로 내 가족임을 표시하였다는 겁니다. 주로 여자들과 노약자들이 남아 있었고, 집이 모조리 불타버리는 바람에 흔한 괭이나 골갱이도 없이 그냥 맨손으로 수습을 할 수밖에 없었고요. 시신 수습과 매장이 한두 달을 훨씬 넘겨 5∼6월까지 걸릴 정도로 힘들었습니다."


졸업생 31명 중 아버지가 있던 친구는 4명뿐
 

너븐숭이4·3 기념관 가시리 노형리와 함께 제주 4·3의 최대 피해지역인 북촌리에는 마을 단위로는 최초로 기념관이 건립돼 연간 5만여 명이 찾아오고 있다. ⓒ 황의봉

 
대학살이 벌어진 이날 하루 희생된 북촌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사건 발생 후 45년이나 지난 1993년에야 비로소 북촌리 원로회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479명에 달한다. 우도 배 사건과 민보단 청년 떼죽음 그리고 북촌마을 대학살 등 4·3 시기에 희생된 사람을 모두 합하면 549명(남자 408명, 여자 141명)으로 집계됐다. 당시 북촌리 가구 323호 가운데 209호에서 인명피해가 발생해 인구의 절반 이상이 희생된 셈이다. 그러나 이 숫자는 사건 발생 후 한참 지난 후에 조사된 것이어서 빠뜨린 경우가 적지 않을 듯하다.

대참사를 겪고 시신 수습이 온전히 끝나기도 전에 살아남은 북촌 사람들은 소개령에 따라 함덕의 군부대로 가야 했다. 이들은 군부대에 수용돼 또 한차례 심문을 받았고, 무장대나 도피자 가족으로 몰린 50여 명이 사살당했다. 그리고는 이웃 마을인 함덕리에서 피난살이에 들어갔다. 황요범 고문의 가족과 북촌 사람들은 어떻게 피난지에서 목숨을 부지했을까.

"함덕리에 친척이 있는 사람들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지만, 연고가 없는 사람들은 동지섣달의 맹추위와 극심한 기아에 허덕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다 못해 생죽음을 당하는 이가 속출했지요. 우리 가족은 어머니가 일본에 있을 때 의자매를 맺었던 분의 오빠가 마침 함덕에 살고 있어서 신세를 질 수 있었습니다. 그 삼촌이 자기 집 외양간의 소를 마당으로 끌어내고는 보릿짚을 깐 자리에 이부자리를 펼 수 있게 해줘 임시거처를 마련했습니다.

피난살이 3∼4개월 동안은 밤잠을 제대로 이루질 못했습니다. 밤이면 밤마다 군인들이 느닷없이 달려들어 이부자리를 걷어차며 폭도들을 내놓으라고 윽박질렀고, 밤이 새고 나면 아침 끼니 걱정을 해야 했어요. 피난민들은 동냥질로 연명을 했는데, 아침이면 연기가 피어오르는 집을 찾아 떼거리로 몰려다녔다고 합니다.

우리 식구는 함덕리 삼촌댁(어머니의 의자매 오빠)에서 한겨울을 넘기고, 이른 봄에 잿더미로 변한 북촌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온 마을이 마치 잿빛 눈으로 뒤덮인 것처럼 까맣게 변해 있었습니다. 집에는 검게 그을린 돌담이 흉측하게 서 있고, 쌀독의 쌀은 새까만 숯덩어리가 되어 있었으며, 외양간에는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밭갈쇠가 길바닥에 죽어 있는 참담한 광경이었지요."


북촌리 마을에 남자라고는 광란의 학살극에서 살아남은 몇몇 노인뿐으로, 한 동네에서 한두 명에 불과했다. 장례를 치르고, 잿더미를 걷어내 초막살이를 마련하는 데에도 5∼6년이 더 걸렸다. 힘겨운 복구과정은 여자들의 힘으로 이뤄졌다. 이런 사연으로 북촌마을은 '여자 마을' 혹은 '무남촌'이라 불렸다.

살 집을 짓는 것만도 여자들에게는 엄청난 고역이었지만 성담 쌓는 일에 동원된 것도 고통을 가중시켰다. '폭도'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폭 4∼5m에 높이 3∼5m가량의 돌담을 쌓아 마을에 차단벽을 설치하는 작업이 벌어진 것이다. 무거운 돌을 날라 성담을 쌓은 후에는 여자들이 밤새 보초를 서야 했다.

이렇게 마을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준 성담이었지만 몇 년 동안 그 담을 넘어와 마을에 폐를 끼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황요범 고문은 이 성담을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통곡의 벽'에 빗대 '비통의 성'이라고 불렀다. 폐허가 된 마을로 돌아와 유년 시기를 보낸 황요범 고문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함덕 피난 시절엔 동냥이라도 했지만, 북촌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사람들이 생명을 이어갈 수 있었던 건 바다 덕분이었어요. 북촌은 그 어느 곳보다도 해산물이 풍부한 곳입니다. 밭이 있다고 해도 농사지을 남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했으니 황폐할 수밖에 없었고 주로 바다에 의존해야 했습니다. 제 어머니도 해녀로 바다에서 물질로 생계를 꾸려나가셨습니다.

제가 북촌국민학교를 졸업했는데, 6회 졸업생 31명 중에 아버지가 있었던 친구는 4명뿐이었어요. 또 작년에 조사해 보니 당시 154명의 홀어머니가 생활을 꾸려나간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런 형편이었으니 중학교에 진학한 동창생은 고작 6명뿐이었고요. 북촌국민학교는 1943년에 개교했다가 졸업생을 배출해보지도 못하고 학살사건 직후인 1949년 2월에 폐교했다가 1952년에 새로 개교했습니다. 폐교로 인해 학업을 중단해야 했던 215명이 52년 만에 명예졸업장을 받아 큰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저는 무사히 고등학교까지 나와 학비 걱정이 없는 사관학교에 가려고 했지만 담임선생님의 권유로 교육대학으로 방향을 바꿨습니다. 할아버지 아버지가 누명을 쓰고 돌아가신 까닭에 연좌제로 인해 사관학교 진학은 어려울 것이라는 게 선생님의 조언이었어요."


현기영 작가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순이삼촌> 소설을 쓰기 위해 북촌리를 찾았을 때 마을 사람들이 아무도 말을 해주지 않아 눈물로 호소했었다고 밝힌 바 있다. 마을 사람들이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잘 말해주는 사례가 바로 '아이고 사건'이다.
 

<순이삼촌> 문학비 북촌리 학살사건의 현장이자 소설 <순이삼촌>에서 주인공이 스스로 죽음을 택한 옴팡밭은 현재 문학비가 놓여져 있다. ⓒ 황요범

 
"예로부터 북촌 마을에는 젊은 청년이 죽으면 장례를 치르기 전날 그의 넋을 기리기 위해 '꽃놀림'을 하는 풍습이 있었어요. 꽃상여를 만들어 온 동네를 순회하며 죽은 사람의 영혼을 위로하는 행사입니다. 1954년 1월, 군대에서 사망한 김석태라는 마을 청년의 유골함이 마을에 도착하는 일이 있었어요. 이때도 꽃놀림 행사가 벌어졌습니다. 그 청년이 어렸을 때 뛰놀던 마을의 곳곳을 돌고 마지막 코스로 꽃상여가 학교 운동장에 도착했을 때였습니다.

누가 뭐랄 것도 없이 '여기서 죽은 조상들을 위해 술 한 잔 올리자'라는 말들이 이어졌고, 신승빈 이장이 '일주일 후면 5년 전 온 마을이 불타고 수백 명이 목숨을 잃은 날이니 불쌍한 영혼들에게 술 한잔 올리겠습니다. 모두 절합시다'라고 한 겁니다. 이에 군중들이 모두 절을 올리고는 몸을 일으키지 못한 채 설움에 복받쳐 '아이고, 아이고' 하며 대성통곡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통곡 소리가 퍼져 인근 지서에서 알게 되었고 상부에까지 보고된 겁니다. 이 사건으로 13명이 제주경찰서로 불려들어가 고문을 당하고 이장이 시말서를 쓰고서야 풀려났습니다. 북촌지서 순경은 파면을 당했고요. 이처럼 북촌마을의 참상은 어느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고, 들어서도 안 됐고, 울음마저 삼켜야 했습니다."


마음 놓고 울지 못했던 반세기
 

너븐숭이 애기무덤 북촌리 학살사건의 주요 현장인 너븐숭이에는 20여기의 애기 돌무덤이 있어 당시의 비극적인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 황의봉

 
마음 놓고 울지도 못하는 살벌한 상황에서 북촌리 사람들은 어떻게 희생자들의 영혼을 위로할 수 있었을까.

"공식적으로 위령제가 베풀어진 것은 제주4·3 특별법이 제정되고 난 이후인 2002년이 되어서야 가능했습니다. 그전까지는 각 가정에서 음력 12월 18일 밤에 일제히 제사를 지내는 것 이외에는 다른 추모행위를 할 수 없었어요. 제삿날에도 가급적 4·3 이야기는 하지 않는 분위기였습니다.

첫 위령제는 민예총에서 찾아가는 위령제 형식으로 진행했어요. 첫 번째로 다랑쉬 오름에서 했고 두 번째가 저희 마을에서 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2005년에 북촌리 유족회가 결성돼 제가 총무 일을 맡기 전까지는 마을에서 공동으로 제사 같은 것을 드리기도 어려웠고요. 너븐숭이에 위령비가 세워진 것이 2008년이었으니까 사건 발생 반세기가 넘어서야 비로소 희생자들을 공식적으로 추모할 수 있게 된 셈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오랫동안 유족들이 숨죽이고 살아왔겠습니까."


황요범 고문은 아기 때여서 기억은 못 하지만 북촌 학살을 목격했고, 그 현장인 북촌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또 모교에서 교사 생활을 한 특별한 인연을 갖고 있다. 그가 북촌 학살사건에 각별한 관심을 두고 활동하게 된 데에는 어떤 계기가 있었을까.

"제가 1972년부터 76년까지 모교에서 근무했습니다. 그때까지도 북촌에서 희생자가 얼마나 발생했는지 자료를 갖고 말해줄 사람이 없었어요. 한번은 4·3에 관심을 가진 일본의 역사 교사들이 북촌국민학교에 찾아온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에게 제대로 설명해 줄 사람을 찾지 못해 실망하고 돌아간다고 하길래 제가 이런 말을 했어요. '한국에서는 아직은 4·3에 대해 자유롭게 말하지 못하는 사정이 있으니 이해해달라'고요.

일본 선생님들이 이 말을 듣고는 의아해하는 겁니다. 엄청나게 큰 피해를 봤는데도 왜 자유롭게 말을 못 하느냐는 것이지요. 그래서 제가 군인들에 의해서 많은 사람이 죽었고 마을이 불탔다는 등의 이야기는 해주었지만, 구체적인 희생자 숫자 등은 정확한 조사자료가 없으니 밝힐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경험이 있은 후부터는 외국인들이 오히려 우리보다 더 관심이 있구나, 하는 부끄러움이랄까 깨달음이 들어 나름대로 열심히 우리 마을의 피해를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예로 아버지 희생당할 때 함께 있었던 사람이 누구누구인지를 어머니께 물어봐 적어 놓고 하는 식으로 자료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4·3 시기 북촌리에서 일어난 민보단 사건이나 대학살 사건 등 중요한 고비마다 아버지 할아버지 외삼촌 등이 희생되다 보니 저희 가족사이기도 해서, 조사하고 사연을 발굴하고 대외적으로 알리는 역할을 해온 것 같습니다."

 

명예졸업식 북촌리 학살사건이 시작됐던 북촌국민학교가 4·3의 여파로 폐교돼 졸업을 못한 215명이 2001년 2월 15일 명예졸업식을 하고 있다. ⓒ 황요범

 
2014년 제주4·3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고 10년이 지났다. 총선을 앞두고 열린 올해 제76주년 4·3 희생자 추념식은 그 어느 때보다도 대통령의 참석 여부가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작년에 이어 또다시 윤석열 대통령은 불참했다. 국가기념일 공식행사에 국가원수가 불참하는 상식 밖의 일이 연이어 벌어진 것이다. 제주도민의 실망감이 쏟아진 것은 당연했다. 이런 상황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2000년에 4·3특별법이 제정되고 그 후 노무현 대통령이 국가원수로서 처음으로 제주도민에게 사과하셨지요. 그리고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자 저희 유족들에게는 이제 4·3의 억울한 사연을 자유롭게 말하고, 영령들을 추모할 수 있게 됐으니 참으로 반가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정권이 바뀔 때마다 이념이 바뀌고, 생각을 달리하는 사람들이 나타나 유족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4·3 때 악명을 떨쳤던 서북청년단이 사라진 줄 알았는데, 2015년에 미국 로스앤젤레스 한인타운에서 미주본부를 결성했다고 하더니, 작년엔 듣기 거북한 현수막이 제주에 등장하고 서청의 후예를 자처하는 세력이 추념식장에서 소란을 피우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태영호 의원을 비롯해 극우 인사들의 망언이 계속 이어지고 있고요. 이런 상황에서 국가원수가 추념식에 참석해 유족들의 아픔을 씻어주고, 집권세력이 겉으로 하는 말과는 달리 4·3 진상조사 결과를 인정하지 않고 4·3을 폄훼하려는 게 아니냐는 우려를 불식시키는 것이 바람직한데, 이런 바람이 무산돼 앞으로 또 다른 4·3 폄훼 논란이 생기지나 않을지 걱정이 큽니다."
 

북촌리가 겪은 비극의 자초지종을 듣자니 이야기가 끝이 없을 것 같다. 76년 전 제주에서 벌어진 국가폭력의 실태를 이해하는 것은 간단치 않은 게 사실이다. 워낙 그 희생자와 피해지역, 그리고 폭력의 양상이 광범위하기 때문이다. 북촌리는 중산간 마을에 비해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었던 바닷가 마을임에도 불구하고 대표적인 4·3 피해지역이다. 이런 까닭에 마을 단위로는 유일하게 4·3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작년 한 해 이곳을 다녀간 이가 5만여 명에 달할 정도로 4·3 관련 필수 순례 코스가 됐다.

너븐숭이 4·3 기념관에서 긴 인터뷰를 마치고 황요범 고문과 함께 북촌리 학살사건의 현장을 둘러봤다. 기념관 바로 앞에는 돌무더기 애기무덤이 북촌의 아픔을 상징하듯 발길을 머물게 한다. 또 비극의 그날 수많은 사람이 끌려가 총살을 당한 현장이자, 소설 속 순이삼촌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옴팡밭은 이제 소설 <순이삼촌>의 문학비가 들어섰다.

대학살의 날 마을 사람들을 집합시켜 사살할 대상을 가려내 끌고 갔던 북촌초등학교는 교문을 옮겼고, 체육관 신축공사를 하고 있었다. 민보단 청년들이 영문도 모른 채 죽었던 낸시빌레에는 호텔이 들어섰고, 또 하나의 학살터 당팟은 노란 유채꽃이 가득해 아름답기만 했다.
 

학살터 당팟의 현재 풍경 황요범 고문이 유채밭으로 변한 학살사건의 현장인 당팟을 가리키며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 황의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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