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4.22 13:27최종 업데이트 24.04.22 13:27
  • 본문듣기

2020년 1월 24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DC에서 열린 제47회 '생명을 위한 행진'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연설을 프로 라이프 시위대가 듣고 있다. 공화당 대선 후보인 트럼프 전 대통령은 지난 8일 낙태권은 미국 주 정부가 결정하도록 맡겨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가장 논쟁적인 이슈 중 하나인 낙태 금지에 대한 엇갈린 입장을 정리하고 사실상 전국적인 낙태 금지를 거부했다. ⓒ 연합뉴스


미국은 지금 국민의 '몸'을 놓고 '전쟁' 중이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낙태권에 대해 연방 정부가 아닌 주 정부가 결정할 일이라는 다소 온건해진 입장을 밝히자, 민심이 다시 휘청거렸다.

지난 9일 <뉴욕타임스>는 트럼프 전 대통령의 입장 발표로 낙태 권리 지지단체와 낙태 반대단체 양측은 물론 공화당 내에서도 의견 분열이 있다고 보도했다. 전문가들은 낙태 반대를 강하게 밀고 나가다 중간 선거에서 뼈아픈 패배를 경험한 공화당이 대선 전략 차원에서 순화된 입장을 조언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미국에서는 태아가 모체 밖에서 독립된 생존력을 가지는 24주 전에 여성의 자기 결정권에 따른 임신 중단이 가능했다. 그러나 2022년 연방 대법원이 낙태권에 대한 1973년의 '로 대 웨이드' 판례를 파기함에 따라 50여 년간 통일되었던 기준이 사라지고 각 주마다 다른 법적 이해를 갖게 되었다. 윤리, 여성의 자기 결정권, 태아의 생존권, 국가의 법적 보호 대상인 '국민'의 범위 해석이 복잡하게 얽혀 주마다 입법 전쟁에 돌입한 것이다. 

'로 대 웨이드' 판례가 단번에 뒤집어진 것이 아니다. 1992년 필라델피아 주지사가 서명한 낙태 금지 조항에 대해 연방 정부가 주 정부의 권한을 인정해 준 전례가 있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임명한 보수 대법관의 힘뿐 아니라 낙태를 반대하는 측에서 전략적으로 주 정부들을 차례로 압박해 온 성과라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연방 대법원의 결정은 지역 갈등으로 번졌다. 지금까지 26개 주에서 낙태 금지 혹은 엄격한 제한이 이루어졌고 24개 주는 낙태권을 보호하는 '낙태 피난처'가 되었다. 1931년에 만들어진 낙태 금지법은 시대에 역행한 것이라고 공식 폐지한 미시간주가 있는가 하면, 무려 160년 전인 1864년의 낙태 전면 금지법을 부활시킨 애리조나주도 있다. 

문제는 낙태 관련 법뿐 아니라 다른 영역으로 논란이 확산하는 데 있다. 지난 2월 앨라배마주에서는 냉동 배아도 사람으로 간주한다는 판결이 나왔다. 인공 수정을 통해 착상이 성공하고 임신이 되면 냉동 보관되었던 배아는 자동 폐기하게 되는데, 배아도 법적 보호 대상인 '어린이'에 포함된다는 판결 때문에 인공 수정을 시도하는 산모 가족과 의료진이 처벌 대상이 된 것이다.

낙태약 사용도 혼란을 가중시켰다. 2023년 4월 텍사스주 법원은 식품의약국(FDA)의 경구용 낙태약 사용 승인을 취소했다. 임신 10주 이내에 사용하는 '미페프리스톤'이라는 이 약은 낙태권을 제한하는 주에서도 응급 시 약국에서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주를 통해 배송받는 우회적인 구입이 증가하자 텍사스를 비롯한 낙태 반대 주에서 강경 대응에 나섰고, 캘리포니아주는 반대로 판매자 보호에 나섰다. 

각 주의 가치관 충돌이 어제오늘의 문제는 아니지만, 낙태 문제가 각종 선거와 시기가 맞물리면서 사회적 합의를 향하기보다 적대적 정쟁으로 고착돼 버렸다. 또한 오래된 법과 현실의 괴리가 커지자, 21세기에 사는 3억 명의 형편을 고작 9명의 연방대법관에게 계속 맡겨도 되는지 성토의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스포츠계에서 일고 있는 몸의 전쟁
 

2022년 3월 17일(현지시간) 미국 애틀랜타 조지아 공대에서 열린 미대학스포츠협회(NCAA) 수영 및 다이빙 선수권대회에서 펜실베이니아대 리아 토머스가 500미터 자유형 경기를 준비하고 있다. 전·현직 여성 수영선수 16명은 NCAA가 트랜스젠더 선수 리아 토머스의 여성부 대회 출전을 허용해 여성 선수들의 평등권을 침해하고 교육 과정에서 성차별을 금지하는 법인 '타이틀 나인'(Title IX)을 위반했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 연합뉴스


낙태 이슈가 전면전 중이라면 스포츠계 이슈는 수면 위로 부상 중이다. 트랜스젠더 선수의 권리와 제한을 두고 지역간에 또 다른 분열이 일고 있는 것이다. 그 중심에는 수영 선수 리아 토머스가 있다.

리아 토머스는 수영 남자부 경기에서 400위권이었다가 2년여의 성전환 기간을 거쳐 여자부 챔피언에 올랐다. 당시 규정으로는 출전 자격에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전·현직 여성 수영선수 16명이 미대학스포츠협회(NCAA)를 상대로 소송을 냈고, 미대학선수협회(NAIA)는 최근 선천적 여성 선수만 여성부 경기 참여가 가능하다는 결정을 내놓았다.

NCAA를 상대로 소송을 낸 여성 수영선수의 어머니는 한 인터뷰에서 '개인의 성정체성 결정은 존중하지만 공정 경쟁을 위한 제도 마련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새로운 세계수영연맹 규정에 따라 사춘기를 지나 성전환을 한 리아 토머스의 올림픽 출전은 좌절될 듯하다. 리아 토머스도 스포츠중재재판소(CAS)에 제소했으나 승소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한다.      

공정성, 기록, 국가대표 자격과 경기 출전권은 물론 종목에 따라 여성 선수의 부상이 늘고 부상으로 인한 조기 은퇴가 빈번해지자 조밀하지 못한 경기 규정 대신 법적 보호를 요청하는 경우가 생겼다. '여성 스포츠를 보호하라'(Save Women's Sports)와 같은 단체의 움직임도 활발해졌고 지난해 텍사스에서 통과된 '여성 경기보호법'과 비슷한 법안을 35개 주에서 마련 중이다. 

트랜스젠더 선수 문제는 다른 방향으로도 확산됐다. 주정부 특히 남부 보수성향 주에서 청소년의 성정체성 결정이나 청소년기 성전환을 제한하는 법을 강화하고 있다. 인디애나주에서는 18세 미만 청소년의 성전환 금지 법안이 통과되었다.

수영뿐 아니라 다른 종목에서도 사춘기 이후 성전환 선수에 대한 제한 규정이 속속 만들어지고 있다. 그러나 정치권과 스포츠계의 손발이 맞지 않아 성전환 선수는 성인 경기는 물론 청소년부 경기에서도 선택권이 사라지고 있다.  

분열 해소할 의지와 대안 있나 
 

지난 3월 18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주 나소 카운티의 브루스 블레이크먼 행정관이 트랜스젠더 여성이 카운티 시설에서 여성 스포츠에 참가하는 것을 금지하는 행정명령에 대해 발표하고 있다. ⓒ 연합뉴스


지난 2월, 뉴욕주 나소 카운티가 미국 최초로 카운티 내 시설에서 트랜스젠더 여성의 여성부 경기 참여를 금지하는 행정명령을 내렸다. 나소 카운티는 뉴욕시에 접한 100여 개의 야구장과 국제 규격의 대규모 체육 시설들을 보유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아이젠하워 아쿠아틱 센터는 매년 대학 수영선수권대회가 열리는 장소다.

나소 카운티의 행정 명령은 지역 경기는 물론 전국 단위 경기에도 영향을 주는 조치다. 뉴욕주 정부는 나소 카운티에 행정명령을 철회하라고 했지만 서로가 '인권에 위배된다'고 맞서면서 갈등이 커지고 있다. 

"어린 여자아이가 사춘기를 거치며 대학 선수에 발탁되기까지 오랜 기간 매달 정서적이고 신체적인 변화를 겪으며 그 자리까지 간다. 개인적으로는 사춘기 이후에 성전환한 선수와 같이 경기하게 하는 건 맞지 않다고 본다. 그러나 자신의 성정체성을 언제 결정하고 어떻게 해결하게 될지 누가 알 수 있을까. 어려운 문제다."

기자가 만난 뉴욕 교외 지역 한 수영 코치의 말이다. 그는 "현장에서 갈등을 겪고 싶지는 않기 때문에 코치들이 따를 수 있는 규정이 빨리 만들어지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최근 나소 카운티의 결정에 대해서는 "(법으로 막기만 하지 말고) 경기에서 뛰고 싶은 선수를 위해 그들이 활약할 방법도 찾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좋은 말이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세계수영연맹이 성소수자 부문을 만들었지만 참가자가 1명뿐이었던 적도 있고 종목과 선수의 사정을 규정에 다 담아내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어른들이 정쟁을 벌이는 사이 선수와 코치, 현장의 혼선은 가속화될 것으로 보인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트럼프 전 대통령은 정치에 나서기 전까지는 낙태에 찬성하는 '프로 초이스'(Pro-Choice, 선택권 보장) 입장이었다가 2011년 공화당 대선 후보 지명 이후 낙태를 반대하는 '프로 라이프'(Pro-Life, 생명 중시)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어떤 이슈든 해결책 모색보다 정당 간 싸움이 돼버리고 마는 양당정치의 단면과도 같은 모양새다. 

지난 14일 미국의 12개 언론사와 단체들은 9월부터 시작되는 대선후보 간 토론회에 양당 대선 후보가 반드시 참여할 것을 촉구했다. 미 대선 토론위원회(CPD)가 내놓을 미국의 당면 과제에 대한 명확한 입장과 대책을 국민들에게 직접 설명하라는 뜻이다.

대선 토론에서 미국의 미래를 볼 수 있을까. 미국의 분열을 가속화할 후보인지, 방향을 잡고 합의를 끌어낼 후보인지 옥석을 가리기 위해 미국인들은 토론회를 보며 고민할까. 아니면 양당과 후보의 노선에 그저 발맞춤을 하게 될지 궁금해진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