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9.15 11:16최종 업데이트 23.09.17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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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평도 평화전망대에서 전면 중앙의 섬이 석도. 멀리 보이는 게 웅진반도. ⓒ 윤태옥

 
옹진반도에 옹진군 말고 강령군이 있고 강령에는 부포항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다. 내가 찾아갔던 연평도의 동북단에 있는 평화전망대에서는 부포항을 육안으로 조망할 수 있다.

연평도에서 가까운 북방한계선(NLL) 바로 위에 석도가 있고 살짝 왼쪽으로는 갑도와 장재도가 잘 보인다. 이 섬들을 대략 직선으로 이으면 옹진반도의 동쪽에 있는 부포항 부근에 닿는다.


한국전쟁 개전 초기에 국군 17연대(연대장 백인엽)가 북한 인민군 3여단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하루 만에 인천으로 철수했던 항구다. 부포항 북쪽의 38선에서 인민군 3여단 포병들에게 우연하게도 개전포격 신호총을 쏘았던 북한 내무성의 청년 간부가 있었다.

참극의 시작을 알린 신호총을 쏜 허웅배
 

1956년 11월 북한 국비 유학생인 정린구(왼쪽부터) 김순자, 허웅배, 한대용(한진), 리경진, 김종훈, 리진황이 소련 전연맹국립영화대학 기숙사 앞에서 찍은 사진. ⓒ 자료사진

 
1950년 6월 25일 새벽 황해도 신천의 인민군 3여단 주둔지, 누군가가 그를 깨웠다. 모두 일어나서 주먹밥을 두 개씩 받아서 먹고는 출동준비를 서둘렀다. 그가 3여단에 온 것은 전날 새벽이었다. 도착하고는 아침 7시에 여단장 최현을 숙소로 찾아갔다. 내무성 장관의 명령에 따라 밀봉된 서류봉투를 여단장에게 직접 전달했다. 세수를 하고 나온 최현은 그에게 말했다.

"또 내려왔군. 이건 뭐야, 거 뭐라 썼나 읽어 봐... 아 알았어 알아. 깜박 잊었군. 이리 줘."

내무성 선전부 군중문화과장이었던 그도 그게 어떤 문서인지 몰랐다. 이틀 전인 6월 23일 금요일 오후 내무상(장관) 박일우에게 다른 두 명의 간부와 함께 38선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을 뿐이었다. 3여단 본부는 세시 반 정도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곳엔 대포가 포신을 드러내고 있었고 옆에는 포탄 상자가 쌓여있었다. 포신의 마개가 열리는데 연대장이 급히 다가와 그에게 부탁했다.

"동지가 5시(남한은 섬머타임으로 4시) 정각에 이 신호탄을 쏘아주시오. 3대대장이 연락이 되지 않아 내가 직접 가봐야겠소."

신호총을 받아든 그는 자신의 손목시계를 연대장의 시계에 맞추는 순간 파견 나온 내무성 간부가 아니라 포병부대의 지휘관이 됐다. 5시 정각에 신호탄을 쐈다. 신호탄이 올라가자 대포와 박격포가 검은 하늘에 일제히 포탄을 쏘아댔다. 천지가 진동했다.
    
그가 여단장에게 전달한 서류봉투는 전쟁개시 명령서였다. 동족상잔이란 참극의 개막 신호총을 바로 자신이 쏜 것이다. 한국전쟁의 목표나 전략전술을 제대로 아는 바는 없었으나 그는 전쟁의 최일선에 선 것이다. 그의 이름은 허웅배(1927~1997), 앞의 글([길 위에서 읽는 한국전쟁12] 북한 인민군 막사가 대한민국 땅에 남아 있다 https://omn.kr/259mo)에 등장했던 인물이다. 6월 25일 새벽, 그는 고작 스물셋이었다.

백선엽의 1사단을 향해 돌격한 김중생
 

왼쪽 사진(김중생 선생 자서전 표지 이미지). 오른쪽 위 사진(안겨 있는 아기 중 오른쪽이 김중생). 오른쪽 아래 사진(뒷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김중생) ⓒ 자료사진

열일곱의 김중생도 그 시각 최전선에 서 있었다. 김중생의 할아버지는 만주에서 민족주의 계열의 무장투쟁을 이끈 김동삼(1878~1937,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었다. 김중생의 아버지인 김정묵은 독립운동가를 아버지로 둔 죄로 소년가장으로 시작해서 갖은 고초를 겪으며 살았다. 아들인 김중생의 일생 역시 롤러코스터 같은 격랑에 휘청거렸다.

인민군 신병이었던 김중생은 황해도 연백군 화성면의 야영지에 4~5일 정도 주둔하다가 최전선으로 이동해서 그날을 맞이했다. 화성면은 38선으로 분단되는 바람에 4분 1 정도는 남한에 속해 있었다. 야영지로 이동해 온 후 누구나 전쟁이 시작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누구도 그런 말을 입에 올리지는 않았다.

6월 24일 날이 어둡기 시작할 무렵 소속 대대의 사병 7백여 명 전원이 야영지에 집합했다. 이 자리에서 문화부대대장이 연설을 하면서 내일 새벽 남조선 해방을 위한 군사공격을 개시한다고 부대원들에게 처음 공개했다. 그 직전 사단 본부에서는 부대대장 이상 장교 1백여 명이 모인 자리에서 김두봉(인민위원회 상임위원장, 북한의 국가수반)이 전쟁개시 명령에 대해 연설을 했다. 문화부대대장은 김두봉의 연설을 그대로 대대원들에게 전달한 셈이었다. 김중생은 "남조선 전체를 점령하는 데 한 달이면 충분하다"는 말을 또렷이 기억했다.

최전방 야산의 참호에 몸을 숨긴 채 돌격신호를 기다렸다. 그 아래 계곡이 38선이었고 계곡 건너의 야산에는 국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5시 정각, 드디어 녹색 신호탄이 올랐다. 늘어선 대포가 일제히 포격을 시작했다. 포격이 20~30분 계속 되더니 또 다른 신호탄이 솟았다. 이번에는 "돌격!"이라는 중대장과 소대장의 육성이 들렸다. 병사들은 일제히 참호를 차고 나가 일렬횡대로 300여 미터 정도의 논밭을 뛰었다. 국군의 저항은 있었지만 격렬하지 않았다. 이들이 목표로 삼은 국군은 예성강 서쪽 방어를 맡고 있던 1사단(사단장 백선엽)의 12연대였다.

김중생도 돌격 함성에 맞춰 뛰었다. 그러나 눈앞의 작은 계곡 곧 38선을 넘기 직전 자기도 모르게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머리를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왼쪽 눈 위에서 피가 흘렀고 눈도 보이지 않았다. 국군의 박격포탄 파편에 맞은 것이었다. 구급단이 황해도 금천의 야전병원으로 후송했다. 이런 순간에 부상을 당했다면 인민군의 한국전쟁 1호 부상병인 셈이었다.

김중생은 1950년 4월 평양의 한 기술학교 학생일 때 징집명령을 받았다. 전쟁 방침이야 이미 정해져 있었고 인민군의 부대편성도 완성된 상태였다. 그러나 장교와 사병의 정원을 채우지 못한 부대가 적지 않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공장·기업·광산·학교·농촌 등에서 많은 병력을 서둘러 보충했다. 김중생과 기술학교 학생들은 학교 운동장에 집합해 교장의 훈화를 듣고는 30~40명씩 무리를 지어 인솔자를 따라 평양역으로 갔다. 기차가 황해도 재령역에 도착했다. 그가 입대한 부대는 인민군 6사단 15연대 신병훈련소. 30여 명의 신병이 4주간 신병교육을 받았다. 그 사이에 두 명 도망자가 발생했다.

실무부대에 배치되고 보니 15연대는 일부 장교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중국에서 온 사람들이라 일상적으로 중국어를 쓰곤 했다. 바로 조선의용군의 후신이었던 만주조선인부대가 입북하여 인민군 6사단으로 전환한 그 부대였다. 그는 신병으로 화성면의 야영지로 이동했고 운명의 그날 최전선에 나섰다가 38선을 넘기 직전에 부상을 당한 것이다. 최전선에서 부상당했으나 치명적이진 않았고 안전하게 후송됐으니 일단 운이 좋았던 것이다.

강원도 양양의 유격대원 성일기
 

성일기 회고록 ⓒ 윤태옥

   
허웅배·김중생과는 정반대의 동부전선, 강원도 양양의 향교는 38선 바로 북쪽이었다. 이곳에서 열여덟의 앳된 유격대원 성일기도 운명의 그날을 맞았다. 그는 1949년 2월 단신으로 월북하여 평양의 부모에게 갔다. 김정일의 부인이자 김정남의 생모인 성혜림의 오빠가 바로 성일기다.

아버지 성유경은 창녕 성씨의 종가였고 갑부였다. 성유경은 보성고보를 졸업했고 진보좌파 활동을 했었다. 일제 패망 후에는 남로당 중앙위원으로 있다가 1946년 정판사 사건 이후 재정부장을 지냈다. 어머니인 김원주는 진남포에서 태어나 서문여고(평양여고)를 졸업하고 1920년대 민족주의 잡지인 <개벽>의 기자 출신이었다. 해방 후 남조선민주여성동맹의 문화부장을 지내기도 했다.

월북한 성일기는 남한 출신의 월북자들과 마찬가지로 강동정치학원에 들어갔다. 당시 북한의 분위기는 날로 긴장을 더해가면서 월북한 청년들에게는 빨치산 복무 의무가 떨어졌다. 당원은 18세 이상이었지만 빨치산에는 연령제한도 없었다.

그는 월북한지 얼마 되지 않은 5월 어머니와 헤어져 함경북도 회령의 제3군관학교로 들어갔다. 차진철이란 가명이 부여됐다. 4개월의 훈련이 끝나고 그는 대원들과 함께 기차를 탔다. 밤중에 내려서야 그곳이 철원역인 줄 알았다. 금화를 거쳐 화천의 사창리로 갔다. 성일기는 연선200지대라는 유격부대에 배치됐다.  

그는 어렸지만 분대장을 맡았다. 1950년 3월에는 오대산 지역에 침투했다. 4월에는 양양으로 돌아오는 김달삼 부대를 맞이하기도 했다. 김달삼은 제주 4.3 무장대의 대장이었던 바로 그 인물. 남으로 출발할 때는 김달삼 부대였으나 돌아올 때는 패잔병에 가까웠다. 성일기가 속했던 연선200지대는 6월 25일 전면전을 개시하기도 전에 300여 병력 가운데 27명만 남았다. 전면전을 앞두고 병력이 보충되면서 600여 병력이 남도부 부대, 강정수 부대로 재편됐다. 이들은 국방부 군사편찬위 자료에는 766부대로 표기돼 있다.
 

성일기 빨치산 이동경로 ⓒ 박종현

이들은 6월 24일 양양 향교 앞에 집결해서 남쪽이 아닌 북쪽으로 이동했다. 속초로 가서는 두 척의 철선에 승선했다. 이날 밤 전체 대원들에게 내일 새벽 38선 전역에서 전쟁을 개시한다고 공개됐다. 대원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그들은 새벽 5시에 가랑비를 맞으면서 임원항에 상륙했다. 상륙 이후 약간의 교전이 있었을 뿐 심각한 저항은 없었으니 작전은 성공적인 것 같았다.

그러나 상륙 목표지점은 죽변이었는데 지휘관이 지도를 잘못 읽는 바람에 죽변이 아닌 임원에 상륙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강행군을 해서 6월 27일 죽변에 도착했다. 28일에는 영덕까지 이르렀다. 영덕에서 산길로 들어서고 칠보산에 도달했을 때부터 국군과의 전투가 본격적으로 벌어졌다.

연평도 바다 건너의 옹진반도에서, 교동도에서 뗏목으로도 손쉽게 닿는 연백에서 그리고 양양의 향교에서, 북한 인민군의 세 청년이 맞은 6.25 개전의 순간들이다. 모두 38선이었다.

1948년 남북에 제각각 정부가 세워지면서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은 북에서는 인민으로, 남에서는 국민으로 정체성 형성되어 갔다. 북의 친소반일 사회주의가 버거우면 월남했고 남의 친미친일 자본주의가 거북하면 월북을 했다. 남북을 어떻게든 통일시키려는 구심력이 있기는 했지만 대국의 힘에 밀려 점차 구호로 가라앉았고, 권력이든 이익이든 남북을 분단하는 게 낫다는 원심력이 훨씬 강했다.

두 개의 배타적 선택을 강요당한 남북의 개인들 
 

세 청년의 그날 위치 ⓒ 박종현

 
세 청년을 포함한 남북의 개개인들은 치명적인 두 개의 배타적 선택지 앞에서 선택을 강요당했다. 당시든 지금이든 평화통일이란 말에 공감하지 않는 청년들은 남이든 북이든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분단은 기정사실화하고 있었고 상대방에 대한 적대감이 증폭되던 시기였다.

이 세 청년들에게 김일성이 주장하는 '국토완정'이나 이승만이 외치는 '북진통일'이란 말은 어떻게 들렸을까. 남한에서는 중대한 사안일수록 이런저런 논쟁이 벌어지곤 했지만, 북한의 청년들은 이미 일방적인 분위기 속에 이 세 청년 역시 감화되는 쪽이었을 것이다.

박명림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전쟁 가능성을 끌어당기는 국토완정론이 북한에서 대두한 것은 1949년 초부터였다. 진원지는 김일성을 정점으로 하는 군부, 인민군이었다. 인민군은 앞의 글에서 살폈듯이, 노동당이나 행정부가 서로 다른 세력이 연립했던 것과는 달리 김일성이 전일적으로 지배하는 체제로 성장했다. 인민군은 혁명에 대한 열정이 강했고 특히 일본군 만주군 출신이 주류가 되어 있는 남한의 군대와 경찰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갖고 있었다. 손에 무기를 쥐면 더욱 강경해지는 게 사람의 본능이라서 더 그랬을지도 모른다.

한국전쟁은 김일성이 꼭두각시가 되어 소련의 사주 받아 일으킨 전쟁이 아니다. 김일성은 스탈린과 마오쩌둥을 적극적으로 설득했다. 소련공산당 중앙위 정치국은 1948년 9월 북한의 남침 전쟁에 대해 명확하게 반대했다. 신속하게 승리할 수 없고 미국의 개입명분만 만들어준다는 이유를 들었다.

그러나 마오쩌둥의 중국 공산당이 장제스의 중화민국을 몰아내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하자 국제적 환경은 크게 요동쳤다. 게다가 소련군이 철수하고 미군이 1949년 1월 38선 경비를 남한에게 인계한 이후 크고 작은 군사적 충돌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북한 군부의 적대적 관념이 38선의 크고 작은 무력충돌과 상승작용을 일으켰고 그 위에 중국혁명까지 성공하자 북한에는 군사주의가 광범위하게 퍼져갔다. 게다가 5만 명의 만주조선인부대가 통째로 입북했다. 소련이 무기를 비롯한 잉여 군수물자를 대량으로 제공하면서 전쟁수행의 물적 기반도 단단해졌다. 모든 조건은 북한이 우월했고, 결국 김일성은 자신의 뜻대로 동족상잔의 전면전을 일으켰으나 실패했다.

한국전쟁을 둘러싼 많은 사람들의 죄과를 따질 수 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죄는 전면전을 개시한 것이다. 불가역적이고 치명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실패로 귀결되는 길에 세 청년의 청춘도 요동친 것이다. 세 사람 모두 전쟁에서뿐 아니라 전쟁 이후에 상상을 뛰어넘는 지독한 곡절과 죽을 고비를 넘겨야 했다. 인생 후반에 그들의 생각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는 굳이 찾아보지 않았다. 세 사람 모두 그의 혁명조국 북한이 아니라 남한을 오가며 살거나 아예 남한에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양양향교 ⓒ 윤태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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