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 5번 타자 임수혁 선수가 숨을 거뒀다. 지하철 전광판에 담담하게 흐르던 그 부음에 난 죽음의 사실보다 그가 참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 있었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초점없는 눈으로 아무 것도 없는 흰 천장을 바라보며 참 오랫동안 삶을 탐색하다 결국 저 세상으로 갔구나 싶었다. 3루를 지나 홈을 염원했지만 무산된 2루 주자처럼. 

그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병상을 찾은 것은 한참 프로야구 선수협의회에 관한 다큐멘타리를 찍던 중이었다. 2000년 1월, 국내 굴지의 대기업으로 구성된 구단의 갖은 방해와 협박에도 선수들은 그들의 노동조합이라 할 수 있는 선수협의 깃발을 올렸다.  

선수협 결성과 임수혁의 부상

 임수혁 선수의 쾌유를 바라며 응원하던 롯데 자이언츠 야구팬들

임수혁 선수의 쾌유를 바라며 응원하던 롯데 자이언츠 야구팬들 ⓒ 롯데 자이언츠


최동원같은 쟁쟁한 선배도 '선수 권익'이라는 이름으로 앞장서다 야구계에서 퇴출된 것을 알고 있던 선수들은 마치 독립운동하는 심정으로 선수협을 꾸려가고 있었다. 막중한 책임감으로 어깨가 무거웠던 송진우 회장님을 담담히 카메라에 담았고 인간적이고 소탈했던 부회장 양준혁 선수는 이미 그때도 카리스마로 사람들을 매료시키고 있었다. 

지금 기아 2군 코치로 있는 부회장 최태원 선수는 특유의 진지함과 낙천성으로 선수협을 지지해 찾아온 자원봉사자들에게 최고의 인기를 한몸에 얻고 있었다. 몸 하나가 재산인 선수들은 심란한 상황에서도 몇 시간씩 개인 훈련을 하면서 짬짬이 사무실에 나와 심각하게 회의를 하곤 했다. 

너른 운동장을 두 손 번쩍 들며 가로지르던 그들은 비좁은 사무실에 모여서 구단의 협박과 흔들리는 후배들의 처지를 고민하며 고개를 떨구곤 했다. 야구선수가 아니라 토론자로 <100분 토론>에 나가 몇 시간씩 자신들을 변호하러 나가야 했을 땐, 퍼펙트 게임보다 더 힘겨워했지만 그들은 잘 견디고 싸워나갔다.

이런 저런 복잡한 상황속에서 임수혁 선수가 쓰러졌다. 난 한 번도 그를 잠실 선수협 사무실에서 보지 못했는데 아마도 마해영과 박정태와는 달리 선수협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선수는 아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선수협은 그럴 수밖에 없는 선수들의 상황마저도 이해하고 동정하는 분위기여서 그의 부상은 모두에게 큰 충격이었다. 

지리멸렬한 선수협, 기약없는 투병 생활

병상의 임수혁 병상의 임수혁

지난 2007년 4월, 병상의 임수혁 선수. ⓒ 김진석


풍납동 아산병원에 누워있는 임수혁 선수의 모습은 참혹했다. 건장하고 든든한 체격은 여전했지만 눈동자는 초점을 잃었고 그의 아내는 시간마다 그의 목구멍을 통해 연결된 관으로 남편의 가래를 받아내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 넓은 그라운드에서 치고 달리던 선수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아빠의 침대 주위를 해맑게 뛰어다니던 일곱 살, 다섯 살의 아이들이 이 비극을 더욱 비극적으로 만들고 있었다. 

마림포라 불리며 막강 롯데 타선을 함께 책임지고 있던 마해영 선수는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졌던 이 모든 상황이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임수혁 선수가 쓰러지고 가장 먼저 달려가 그를 일으켜 세웠지만 이미 의식이 없더란다. 바지는 이미 젖어 있었고 입에선 거품이 나오고 있었단다. 응급 요원을 불렀지만, 제대로 응급 처치를 할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그는 당시 운동장에서 즉각적인 응급처치가 있었다면 임수혁이 뇌사까지 가는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며 병실 문을 나서지 못하고 분개해했다. 카메라를 들어야 하는 나는 본분을 망각하고 분노와 슬픔이 범벅이 된 동료 선수의 말을 담담하게 듣고 있어야 했다. 이제 겨우 서른 하나가 된, 평생 운동밖에 모르던 이들이 받아들이기엔 모든 상황이 너무나 절망적이었기 때문이었다.  

팬들의 지지와 여론과는 반대로 구단과 KBO를 비롯한 안쪽 상황은 여전히 절망적이었고 마해영과 임수혁이 소속된 롯데의 경우도 처음 16명에서 마해영, 박정태만 남기고 모두 탈퇴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동료 임수혁의 사고에 누구보다 동분서주했던 마해영은 다음해 삼성으로 트레이닝되었다. 괘씸죄란 해석이 분분했다. 

그 이후 임수혁 선수는 비싼 병원비 탓에 아산병원에서 저렴한 병원으로 옮겼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 전까지 종종 찾아뵈었던 임 선수 아버님은 누워있는 아들보다 빨리 나이를 먹고 계셨다. 넉넉하지 않은 살림이 눈에 보여 그가 집안에서 어떤 위치였는지 짐작이 돼 더 안타까왔다. 단아한 그의 아내도 눈부신 젊음만큼 힘겨운 병실 생활을 하고 있었다. 빨리 아빠가 잠에서 깨 자신들과 놀아주길 바라는 아이들과 함께.

그는 가고 없지만, 선수협은? 궁금해졌다

그의 부음에 난 초점없는 눈으로 천장을 바라고 있던 그의 하얀 얼굴이 생각났다.  그는 가끔 침대에서 몸을 뒤틀어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곤 했는데, 그건 단지 무의식 중에 나타나는 반사반응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이미 뇌사에 대해 반 전문가가 되어 있었고 젖은 수건으로 남편의 몸을 썩썩 닦아내던 아내도 이미 노련한 간병인이 되어 있었다. 이렇게 끝을 알 수 없는 병실 생활에 그의 가족들은 환자보다 더 끈질기게 잘 견디어 낸 듯하다. 마지막 가는 아들의 모습에 담담해 했다는 아버지에 대한 기사를 읽어보니 말이다. 

그 이후 선수협은 문화관광부와 공정거래위원회의 중재 하에 사장단의 공식 인정을 받게 된다. 대기업 구단들도 시대를 거스를 순 없다고 느꼈던 것일 테다. 하지만 그 조건으로 선수협을 이끌어 오던 집행부는 일괄사퇴하게 되고 다음해 양준혁은 LG로, 마해영은 위에서 언급한 대로 삼성으로 트레이드 된다. 대변인 강병규도 더 이상 마운드에 설 수 없게 됐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서 다윗의 승리를 바라던 사람 중의 한 명이었던 나는 씁쓸하게 카메라를 내려놓았고 선수협이란 이름은 유명무실하게 지끔껏 이어져오고 있다. 

그들이 처음 주장했던 선수들의 은퇴 연금이나 2군 처우 개선 같은 것이 10년이 지난 지금 어떻게 달라졌는지 솔직히 난 잘모른다. 하지만, 당시 선수협에 반대해서 KBO가 내세우던 '시기상조'라는 기자회견을 자처해 동료들을 힘들게 했던 해태의 이호성 선수가 마포 네 모녀 살해사건 용의자로 수배받다 한강에 투신한 사건을 보며 그것들이 잘 관철되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추신수 선수의 삼촌으로 나온 작은 탱크 박정태 선수가 왜 그렇게 오랫동안 우리 뇌리에서 사라져 있었는지 순간 씁쓸했다. 주전 선수가 경기 중 쓰러지자 동료의 온정과 가족의 헌신만으로 10년을 사투하다 눈을 감았다는 뉴스에는 더욱 가슴이 아프다. 10년 전 자신의 처지를 자각하고 팔 걷고 나섰던 우락부락했던 그들이 다시 보고 싶다. 임수혁 선수가 그들을 생각나게 해줬다.

임수혁 선수협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8,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2000년부터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뉴욕 거주중.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