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9세기 러시아 제국, 모스크바 귀족 가문 출신의 '안토니나'(알리오나 미하일로바)는 파티장에서 일생의 사랑을 발견한다. 바로 러시아 최고의 '표토르 차이콥스키'(오딘 런드 바이런). 그날부터 그녀는 그와 결혼해서 평생을 함께하겠다는 꿈을 실천에 옮긴다. 그가 재직하는 음악원에 입학하고, 그에게 연애편지를 보내고, 신에게 간절히 기도한다. 그렇게 안토니나는 차이콥스키의 아내가 된다. 
 
하지만 신혼의 단꿈도 잠시. 그녀와 표토르의 사이는 점점 벌어진다. 급기야 남편은 일방적으로 이혼을 요구하고, 별거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안토니나는 결코 차이콥스키의 아내의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는다. 그의 명성과 재산을 탐내서가 아니다. 그녀는 그를 사랑하기 때문. 또 사랑이 유효한 이상 그들을 갈라놓을 수 있는 존재는 신밖에 없으니까. 

차이콥스키의 아내, 러시아의 이카로스
 
 영화 <차이콥스키의 아내> 스틸 이미지.

영화 <차이콥스키의 아내> 스틸 이미지. ⓒ (주)엣나인필름

 
파란 지중해 위를 내려쬐는 태양. 그 사이를 황금날개가 거침없이 노닌다. 이카로스다. 아버지 다이달로스와 함께 갇혀 있던 감옥을 탈출한 기쁨에 취한 그. 따스히 자기를 감싸는 태양빛에 마음을 빼앗긴 채 계속해서 태양을 향해 나아간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이카로스가 태양을 향해 날아갈수록, 황금날개의 밀랍이 녹고, 그는 그렇게 깊은 바다의 심연 속에 빠지게 될 운명임을. 

19세기말 러시아 제국에도 이카로스가 있었다. 그저 여성이었고, 태양이 아닌 한 작곡가를 경외했으며, 바다가 아닌 은반 같은 호수 밑으로 침전했을 따름이다. 2022년 제75회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받은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감독의 <차이콥스키의 아내>는 러시아의 이카로스, 안토니나 차이콥스키의 이야기를 다뤘다. 

안토니나는 결혼 이후 평생을 차이콥스키의 아내로 살았지만,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한순간도 영위하지 못한 비운의 여인. 세레브렌니코프는 그녀의 일생을 스크린 위에 펼쳐 놓는다. 특히 그녀의 황금날개가 무너져 내린 이유를 때로는 날카롭게, 때로는 거북하게, 때로는 환상적으로 풀어낸다. 

태양을 만난 황금날개의 비상과 추락

세레브렌니코프는 안토니나의 황금 날개에 집중한다. 그녀는 차이콥스키라는 태양을 향해 날아오르고, 태양과 행복한 오후 시간을 보내지만, 이내 그 태양 때문에 추락해 갈사한다. 카메라는 철저히 안토니나의 시점에서 그 과정을 담아낸다. 안토니나의 내면을 파고드는 심리학 보고서인가 싶을 정도다. 이때 핵심은 불이다. 불의 모티브를 적극 활용해 태양의 광채, 따스함, 흉포함을 모두 보여준다. 

일례로 파티에서 만난 차이콥스키를 그리워하는 안토니나의 방은 어두침침하다. 자욱한 안개가 방 안을 가득 메웠다. 그러나 그가 그녀의 방에 찾아오고, 청혼을 받아들이자 그녀의 방은 달라진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햇빛이 가득하다. 분명 실내인데, 날 좋은 오후에 공원에서 산책하는 것처럼 밝고 따뜻하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그녀의 결혼은 이내 파탄 난다. 아내를 친구 다음 순위로 두는 남편. 아내와의 성관계를 거부하는 남편. 그런 남편에게 안토니나는 지치고, 그들 사이는 조금씩 벌어진다. 이번에는 촛불이 등장한다. 수직으로 길게 뻗은 촛대와 촛불은 안토니나와 표토르를 이어 줄 수평선을 자꾸만 끊어버린다. 

촛불은 이제 화재로 번진다. 차이콥스키는 이혼을 요구하고, 별거를 유지하며, 생활비만 붙인다. 그런데도 그녀는 이 관계를 놓지 못한다. 남편, 아이들과 가족사진을 찍는 꿈을 꾸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하지만 꿈은 소음과 함께 끝나고, 눈을 뜬 그녀는 온 집을 삼킨 화재를 발견한다. 결혼반지마저 불 속에 놓고 창문에서 몸을 던지는 안토니나. 불을 피해 몸을 던진 그녀는 태양 때문에 바다에 빠진 이카로스와 다르지 않아 보인다.

화려한 러시아 제국의 민낯
 
 영화 <차이콥스키의 아내> 스틸 이미지.

영화 <차이콥스키의 아내> 스틸 이미지. ⓒ (주)엣나인필름

 
이카로스가 죽은 이유는 명확하다. 태양에 가까이 가면 밀랍이 녹을 수도 있다는 아버지의 경고를 무시한 대가다. 안토니나가 추락한 이유는 다르다. 미련과 집착을 버리지 못한 그녀의 잘못만큼이나 시대의 책임도 무시할 수 없다. 이 지점에서 <차이콥스키의 아내>는 화려하게만 보이는 러시아 제국의 민낯을 공개한다. 

영화는 의미심장한 자막으로 시작한다. 자막에 따르면, 19세기 후반 러시아 제국에서는 여성이 마음대로 이혼을 할 수 없었다. 정부의 공식 허가가 떨어지거나, 법원의 명령이 필요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양측이 이혼에 동의하거나, 한쪽에 명확한 귀책사유가 있어야만 했다.

문제는 이 법 때문에 평행선을 달리는 차이콥스키와 안토니나의 입장 차이가 좀처럼 접점을 찾지 못했다는 것. 차이콥스키는 동성애 성향 때문에 퍼진 소문을 가라앉히기 위해 안토니나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 대가로 신경 쇠약과 우울증을 앓았다. 그렇기에 그는  자기가 불륜을 저질렀다는 거짓 사유를 인정하면서까지 이혼을 요구했다. 

반면에 안토니나는 남편의 요구를 수용할 수가 없다. 그녀는 진심으로 남편을 사랑하기에 이혼에 동의할 수 없다. 또 진정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남편이 불륜을 저지른 적이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녀는 죽음이 그들을 갈라놓을 때까지 이혼 서류에 서명하지 않았고, 집착과 미련의 결혼 생활을 이어갔다. 두 소수자의 잘못된 만남을 파국으로 몰아간 사회가 낳은 비극 속으로 빠져든 셈이다.  

차이콥스키 없는 차이콥스키 영화

<차이콥스키의 아내>는 표토르와 안토니나의 평행선을 제목에 충실한 화법으로 전달한다. 사실 아무리 클래식 음악에 문외한이라 해도 차이콥스키라는 이름을 모르는 경우는 많지 않다. 바이올린 협주곡을 비롯한 그의 음악은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클래식 음악 중 하나이기 때문. 하지만 그의 음악 세계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일생에 대해서는 대중적으로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바로 이를 역이용한다. <차이콥스키의 아내>에서 차이콥스키에게 부여된 분량은 많지 않다. 대신 그의 개인사와 성적 지향은 철저히 복선으로 암시된다. 영화는 결혼식을 시작으로 이혼하는 순간까지 계속해서 자그마한 복선을 던진다. 그렇게 신발 속 모래 알갱이 마냥 뭔지 모를 불편함과 물음표를 조금씩 키워 나간다.  

예를 들어 결혼 소식을 접한 차이콥스키의 친구들은 하나같이 묘하게 반응한다. "자네가 결혼을 하다니 의외네?" 같은 대사와 함께 안토니나에게 미묘한 축하를 건넨다. 그뿐만이 아니다. 표토르는 안토니나가 한껏 힘을 준 옷이나 장신구를 보고 예쁘다는 말을 한 번도 건네지 않는다. 불협화음은 계속된다. 영감을 받은 표토르가 피아노 연주에 몰입하려는 찰나에 안토니나가 끼어드는 식이다.  

이 장면들은 안토니나가 이혼 통보를 받은 뒤 시퀀스와 이어진다. 가족사진 촬영이 대표적이다. 신혼 때 부부 사진을 찍으러 간 표토르와 안토니나. 하지만 막상 카메라 셔터가 눌리는 순간, 차이콥스키는 아내와 다른 곳을 바라본다. 마치 결혼 생활에 초를 치려는 듯이. 이 장면은 가족사진을 찍는 안토니나의 꿈과 이어지면서 그녀의 절망을 더 강조한다. 

무대 위에서 피어나는 우울함
 
 영화 <차이콥스키의 아내> 스틸 이미지.

영화 <차이콥스키의 아내> 스틸 이미지. ⓒ (주)엣나인필름

 
안토니나의 추락은 무대 예술을 보는 듯이 독특한 연출 덕분에 더욱 인상적이다. 연극처럼 막이 바뀌거나, 연극 무대처럼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공간이 이어지는 식으로 그녀 내면에 자리 잡은 우울함과 불안감을 표출하는 장면이 거듭 등장한다. 

이는 당시의 분위기를 메타적으로 표현하고, 또 비판하는 연출이라 할 수 있다. 세레브렌니코프의 말을 빌리자면, "그 시대가 워낙 연극적"이었으니까. "당대의 사람들은 사회가 요구하는 의상을 입었고, 사회가 기대하는 표정을 지었고, 사회가 강요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했으니까. "인생은 일종의 무대 연출이었고, 각자에게 정해진 배역"이 있는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그저 아름답지만은 않다. 어둡고 차가운 빈방에서 안토니나는 남자 무용가들과 춤을 춘다. 이 발레는 마치 그녀의 내면을 끄집어낸 것 같다. 차이콥스키를 향한 비틀린 사랑, 집착과 광기가 무대를 가득 채운다. 피아노 건반음이 강조된 음악이 더해지면 안토니나의 불안정한 상태를 눈, 귀, 가슴으로 느끼기에 충분하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비록 불운한 시대와 사회가 그녀에게 잘못된 결혼 생활을 안겨줬지만, 비극을 잘라내지 않은 선택은 온전히 안토니나의 본인의 몫이라는 것. 이처럼 찜찜하고 불쾌한 마무리 덕분에 <차이콥스키의 아내>는 뇌리에 강렬히 각인된다. 비록 전형적인 구성과 마무리는 아니지만, 안토니나 차이콥스키의 일생과 사랑을 이해하는 데는 전기 영화로서 이보다 충실하기도 어려울 테니까. 
덧붙이는 글 개인 블로그(https://blog.naver.com/potter1113)와 브런치(https://brunch.co.kr/@potter1113)에 게재한 글입니다.
영화리뷰 차이콥스키의아내 키릴세레브렌니코프 러시아제국 칸영화제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영화를 읽는 하루, KinoDAY의 공간입니다. 서울대학교에서 종교학과 정치경제철학을 공부했고, 지금은 영화와 드라마를 보고, 읽고, 씁니다.

top